▣ 정재권 한겨레21 편집장 jjk@hani.co.kr
‘아이비’(ivy)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 것은 70년대 말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였습니다. 붉은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학교 건물 전체를 담쟁이덩굴 잎이 근사하게 덮고 있었습니다. 도종환 시인의 시구처럼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절망의 벽을 거꾸로 오르며 한여름을 녹색으로 물들이는 열정도 그렇고, 늦가을 붉게 타들어가던 처연한 사그라짐도 그렇고, 담쟁이는 참 아름다웠습니다.
담쟁이덩굴이 미국 북동부의 명문 사립 8개 대학을 지칭하는 단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입니다. 하버드와 예일·프린스턴·컬럼비아대 등을 묶어 부르는 ‘아이비리그’ 말입니다. 이 대학들의 오랜 건물도 담쟁이덩굴이 뒤덮고 있다지요. 까까머리 고교생들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미국 대학에 견줘가며 우스갯소리로 학교를 ‘아이비 스쿨’이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제겐 추억과 아련함의 대상인 아이비가 2006년 대한민국에선 교육 열풍의 아이콘입니다. 흔히 ‘스카이’(SKY)로 통칭되는 국내 유명 대학을 넘어, 미국의 유명 대학에 진학하려는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전쟁 말입니다.
은 631호(2006년 10월24일치)에서 그 열풍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강남 사람들은 차병원에서 태어나 대치초등학교, 대청중학교, 대원외고, 서울대를 졸업한 뒤 리츠칼튼호텔에서 결혼한다고 한다. 대한민국 최상류층의 성장 경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강남 사람들은 차병원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조기유학을 떠났다가 17살에 한국에 돌아와 외고 유학반에서 공부한다. 그 다음 미국 명문대학을 간 뒤, 다국적 기업에서 직장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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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아이비 열풍을 무작정 탓할 일만은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서 학벌은 사회적 지위를 보장하는(조금 과장해 ‘계급’을 재생산하는) 가장 주요한 통로가 된 지 오래니까요. 채용 포털 잡코리아가 최근 직장인과 대학생 1238명을 상대로 ‘한국에서 성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물었더니, 학벌이 맨 앞자리(22.4%)를 차지했습니다. 그 다음이 외모(21.9%), 경제적 뒷받침(19.8%), 대인관계 능력(12.4%) 등의 순서였습니다.
문제는 학벌 지상주의가 낳고 있는 일그러진 사회상입니다. 아이비리그행 티켓을 쥐기 위해 학부모들은 ‘올인’하고, 그 과정에서 경쟁의 공정성 같은 교육의 기본 가치는 훼손·무시됩니다. 이 들여다본 일부 외고의 유학반은 한마디로 요지경입니다. 좋은 내신성적을 요구하는 학부모들에게 밀려 학교는 ‘수’에서 ‘미’에게까지 A등급을 부여하고(‘양’ ‘가’는 A-등급), AP(미국 대학과목 선이수 제도) 시험을 보는 학생들은 중간고사를 면제시켜주기도 합니다. 실제 시험 문제가 며칠 전 풀어본 연습 문제와 같았다는 얘기까지 나돕니다.
결과가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쟁의 압축판이 된 ‘아이비 유학반’. 과연 아이비로 간 아이들에게 박수를 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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