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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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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시리즈

등록 2006-11-10 00:00 수정 2020-05-02 04:24

▣ 정재권 한겨레21 편집장 jjk@hani.co.kr

당황스럽습니다. ‘일심회’라는 이름의 공안사건이 불쑥 터진 직후 김승규 국가정보원장은 와 만나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건은 고정간첩이 연루된 간첩단 사건으로 보인다.” 한창 수사가 진행 중인 사건에 대한 국정원장의 공격적인 성격 규정입니다.
이 말 한마디로 국정원의 오랜 불문율은 깨졌습니다. 정보기관장은 재임 중 언론과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는, 40여 년을 지켜온 불문율 말입니다.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한다’는 대한민국 정보기관이 이참에 음지를 포기하고 양지로 나서려는 걸까요.
하지만 김 원장은 사법처리를 걱정해야 할 판입니다. 이 사건 구속자의 변호인들은 그를 형사소송법(피의사실 공표)과 국가정보원직원법(비밀엄수) 위반 등의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원장이 고소당했는데도 국정원 내부의 평가는 싸늘합니다. 한 고위 간부의 반응입니다. “인터뷰 때 경호 인력은 도대체 뭘 한 거야.”
황당합니다. ‘386 간첩단’이라는 딱지가 나돕니다. 일심회에 386을 덧씌웠습니다. 가 한 걸음 앞질러 내린 성격 규정입니다. 오랜 가뭄에 물을 만난 고기마냥 보수진영이 발기해 386세대를 겨냥합니다. 이 교묘한 여론재판에는 정치적 노림수가 번득입니다. 가뜩이나 주눅든 386세대가 ‘386’이라고 말하기조차 두려운 세상이 오나 봅니다.
고진화 한나라당 의원은 이렇게 항변합니다. “386세대는 87년 민주화 투쟁을 통해 민주화를 이뤄낸 자랑스런 역사를 가진 세대다. 386세대에 대한 이미지 조작 시도는 의도된 인권탄압으로, 386세대 300만 명이 다 간첩이냐.”(10월31일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
황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정보기관장이 돌출행동으로 보수신문의 입맛에 딱 맞는 뉴스를 제공하고, 보수신문은 “김승규 원장, 역사는 그를 의인(義人)으로 기록할 것”이라고 침이 마르게 칭송합니다.
도대체 그 이름도 묘한 ‘일심회’는 어떤 단체일까요? 그들은 과연 남쪽을 뒤흔들 만큼 힘이 있는 존재일까요? 남쪽은 일심회에 흔들릴 만큼 허약한 체질일까요?
‘할 말은 하는’ 10월30일치 1면을 봅니다. 북한이 일심회에 “야 대선후보 동향을 보고하라”는 지령을 내렸다는 게 머리기사입니다. 내년 대선에 개입할 의도라는 친절한 설명도 따라붙습니다. 1960, 70년대나 들을 법한 복고풍 지령입니다. 하지만 어쩌나요. 일심회가 애써 보고하지 않아도 야당 대선후보 정보는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인터넷 포털 네이버의 검색창에 ‘이명박’을 치면, 11월2일 하루에만 모두 110건의 이 전 서울시장 관련 뉴스가 새롭게 떠오릅니다. 이보다 더 상세한 야당 대선후보의 ‘동향’이 있을까요?
곰곰이 생각할수록 ‘침소봉대’라는 단어가 머리에서 가시지 않습니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쓴다는 옛말도 생각납니다. 2006년 가을 우리 사회에서 펼쳐지고 있는 60, 70년대의 풍경들. 이 황당 시리즈의 끝은 어디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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