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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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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독이 될 거야

등록 2006-08-25 00:00 수정 2020-05-03 04:24

▣ 조영아 소설가· 지은이

우리는 편리한 그 무엇이야. 우리는 대체로 가볍고 휴대하기 간편해. 우리는 잘 상하지도 썩지도 않아. 우리는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어. 세상에 널려 있지. 요즘 우리는 행복해서 미칠 지경이야. 우리만큼 당신들의 사랑을 한몸에 독차지하고 있는 게 또 있을까. 우리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전혀 감이 안 온다고? 글쎄. 당신도 우리를 사랑하고 있을 텐데.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중 하나를 품에 끼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하루 종일 우리하고 연애를 하고 지내는지도 몰라. 그래도 모르겠어?

우리 원조는 나무젓가락

우리의 탄생은 나무젓가락에서 비롯되었어. 말하자면 우리 중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이가 바로 나무젓가락이지. 우리들의 시조라고도 할 수 있어. 학창시절 친구들과 분식집에서 라면 먹던 기억을 떠올려봐. 김이 솔솔 나는 라면 그릇을 앞에 두고 자~ 나무젓가락을 하나씩 집어들어. 비닐을 벗기면 뽀얀 그애 다리처럼 가지런한 나무젓가락이 기다리고 있지. 양손으로 한 가닥씩을 잡고 ‘오늘은 그애를 만날 수 있을까 없을까’ 점을 쳐. 기도하는 심정으로 나무젓가락을 갈라. 아, 이런 짝짝이로 갈라졌어. 재수 없게도 오늘은 그애를 만날 수 없어. 이런, 잘못 갈라진 나무젓가락 하나 때문에 라면 맛이 떨어진 당신은 모든 걸 나무젓가락 탓으로 돌렸지. 그렇게 우리는 어느 날 슬며시 낭만이 되었어.

나무젓가락으로 시작된 우리 가문은 그 종자를 마구 퍼뜨리기 시작했어. 그건 순전히 당신들의 수요에 힘입어서지 우리들 자신이 풍기문란하게 그러고 다닌 건 절대 아니야. 우리는 이런저런 이름과 모습으로 당신들 생활 속에 깊숙이 파고들었지. 지극히 평범한 시민 김씨의 하루만 봐도 알 수 있어. 밥도 못 먹고 출근한 김씨, 회사 근처 편의점에서 인스턴트 우동으로 허기진 배를 달래는군. 김씨가 먹고 있는 우동을 잘 살펴봐. 매끈하게 생긴 그릇과 들고 있는 젓가락. 김씨는 동료 여직원 주려고 샌드위치를 사. 샌드위치는 투명 용기로 포장돼 있어. 열심히 일한 김씨 동료들과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해. 다행히 이 식당에선 우리들이 보이지 않는군. 그런데 배부른 김씨가 이를 쑤시는 저것은? 자리로 돌아온 김씨 자판기 커피를 뽑아들고 티슈로 입가를 닦고 있는 여직원에게 다가가는군. 퇴근 후 모처럼 여직원과 영화관에 간 김씨 팝콘과 콜라를 빼놓을 수 없지. 마냥 행복한 김씨 콜라처럼 톡톡 쏘는 인생이 될까? 우리를 너무 가까이 하는 김씨, 만남도 사랑도 우리처럼 되면 어쩌지? 이건 비단 김씨만의 이야기가 아니야. 너도 나도 모두 아무렇지도 않게, 오히려 무슨 문제 있어?, 하는 식이야. 그렇게 우리는 어느 날 문득 문화가 되었어.

툭하면 화내고 싸우고 버리고 갈라서고…

우리를 선호하는 가장 큰 이유는 편리함에 있어. 손에 물을 묻히지 않아도 되는 접시, 존재의 의미를 잊게 해주는 빈 도시락, 빨지 않아도 되는 기저귀. 당신들에게 편리함이란 뭘까. 왜 편리함에 그토록 열망할까. 힘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로? 혹시 세상이 당신들을 유혹하는 게 아닐까. 편리한 게 좋은 거잖아, 할 일도 많은데 그렇게 한가해?, 라고. 우리를 홍수처럼 쏟아내는 세상이 당신들의 사고를 세뇌시키는 건 아닐까. 설거지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기다리고 있잖아, 라고. 도대체 더 가치 있는 일이 뭔데. 우리들의 편리함을 빙자해서 당신들은 대체 무슨 역사를 이루었을까. 편리함과 가벼움을 맹신하는 당신들의 세상을 한 번쯤 돌아보라고. 조금만 불편해도 참지 못하고 조금만 무거워도 분노하는 당신들. 세상은 점점 경박해지고 당신들의 머릿속도, 가슴에 품은 감정도 차츰 우리처럼 돼가고 있지. 툭하면 화를 내고 툭하면 싸우고 툭하면 갈라서고 툭하면 버리고 툭하면 찌르고 툭하면 뛰어내리고. 아아, 이러다간 당신들이 우리보다 더 가벼워지겠어. 아무 생각 없이 버려지는 우리처럼 당신들은 자신 스스로를 ‘툭하면’ 아무렇게나 내던져. 마침내 자신이 누구인지조차도 생각하려 들지 않을 거야. 한 번 쓰고 버려지는 우리처럼 아무 때 아무 곳에다 쓰윽 버리면 그만이니까. 결국 우린 낭만도 문화도 아닌 무시무시한 그 무엇이 될 거야. 이래도 우리가 누군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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