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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 몇살이야?

등록 2006-07-06 00:00 수정 2020-05-02 04:24

▣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1998년 11월의 일이다. 평양에 갔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 간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기자들의 방북 기회도 많아졌지만, 그때만 해도 흔치 않은 기회였다.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의 타계 3주년을 기려 남북의 예술인들이 제1회 윤이상통일음악회를 평양에서 열었다. 최학래 전 한겨레신문사 사장(당시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사무총장)을 제외하곤 서울연주단 일행 10여 명이 모두 초행길이었다.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어’ 했지만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일행 1명에 북쪽 안내원 동무 1명씩 붙었다.
11월3~5일까지 사흘 동안 열린 연주회는 모두 다음날치 1면을 장식했다. 못다 한 이야기를 서울에 돌아와 233호에 ‘감동의 무대, 남쪽으로 흘러라’ ‘아름다운 새벽, 칠흑 같은 어둠’ 등의 특집기사에 담았다. 기사로만 보면 평양에서의 1주일은 지극히 평안했다.
하지만 못다 한 야그가 있으니…. 사건은 11월3일 첫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 뒤풀이 자리에서 벌어졌다. 지금이라고 경제 사정이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지만, 당시 북쪽은 ‘고난의 행군’ 시절이었다. 불세출의 영웅으로 모시던 김일성 주석을 몇 년 전에 잃었고, 물난리와 가뭄을 겪으면서 식량과 에너지 사정이 최악이었다. 갖가지 이유를 대며 보여주지 않는 것까지 보려 애썼다. 옷차림이 남루하고 꼬장꼬장한 아이들이 눈에 띄기는 했지만, 일부 ‘반북’ 신문들이 떠들어대듯이 “평양에도 거지들이 득실거리는” 수준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친북 인사’(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간절히 바라며 십수 년 동안 받아온 반공교육으로 인한 냉전적 사고의 틀을 벗어나려고 애쓴다는 의미이니 부디 오해하는 독자가 없기를)임을 자처했던 기자는, 뒤풀이 자리에서 긴장이 풀리고 말았다. 사실 뒤풀이 자리에는 남북의 예술가들이 모여 연주평도 하고 정담도 나누는 자리여야 할 텐데, 그 자리에는 서울에서 온 예술단 10여 명과 안내원 동무들만 있었다. 1명씩 돌아가며 소감을 얘기하고 건배 제의를 했다. 말석에 앉아 있던 기자 순서가 왔다. 하나마나 한 소리를 몇 마디 한 뒤 어렵게 입을 뗐다. “오가면서 본 인민들의 표정이 밝지 않은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분위기가 쏴 해지더니 테이블 저쪽에서 쨍하는 소리가 들렸다. “야, 김보협이~ 너 몇 살이나 먹었어? 니가 뭘 안다고 그래? 내일부터 연주회 없어!” 서울연주단의 단장을 맡은 ‘동무’의 일성을 신호로 여러 동무들이 일제히 한마디씩 거들었다. ‘적진’ 한가운데서 붙은 싸움이었지만, 기자 3년차인 왕성한 혈기가 가만있지 않았다. “아니, 그 정도 얘기도 못해요? 체제를 비판한 것도 아니고 애정을 갖고 한 소린데?” 몇 차례 고성이 오간 뒤 서울연주단 어른의 손에 끌려 자리를 피했다.
침대에 누워 한참을 씩씩거리는데 갑자기 웃음이 터져나왔다. 어쩜 그리 똑같을까. 나이가 몇 개인지 따지면서 시작하는 싸움의 방식. 엉뚱한 데서 민족적 동질성을 발견했다.
어쨌든 다음날 아침 어쭙잖은 사과를 주고받은 뒤 사흘 일정의 연주회를 포함해 남은 일정을 무사히 마쳤다. 방북 취재 이후 기자는 남한과 북한이라는 표현 대신 남쪽, 북쪽을 즐겨 쓴다. 그때 그 동무들 중 몇몇은 이제 고위급이 되어 남북 행사에서 가끔 얼굴을 비친다. 다른 동무들도 모두 건강하게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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