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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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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플렉스

등록 2006-06-14 00:00 수정 2020-05-03 04:24

▣ 임경숙

이름값 한다는 불임클리닉에 와서 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저출산 문제에 대해 나라가 들썩이니까 부끄러워 숨기고 싶다기보다는 왠지 나라에 좋은 일 하는 느낌마저 든다. 하긴, 여길 다니기 시작한 것은 딱히 근본적인 불임 문제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다만 인생계획을 더 효율적인 방식으로 치밀하게 실행하기 위함이었다. 속셈은 이랬다.

출산계획 일·이·삼·사, 야무진 속셈

일. 결혼 뒤, 일단 아슬아슬하게 노산 소리를 들을랑 말랑 할 때까지 열심히 회사를 다닌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 못해도 최소한 팀장 자리는 맡아놓도록 한다. 그래야 출산 몇 년 뒤에 복귀해도 제자리 찾아서 억울하지 않게 맞춰 들어갈 수 있다. 이. 아슬아슬한 노산 직전까지 가열찬 맞벌이로 어느 정도의 수입을 확보했다고 자신하면 그 다음의 프로젝트, 출산에 몰입하도록 한다.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시간 낭비하지 않고 바로 제일 용하다는 불임클리닉을 찾아내서 등록한다. 삼. 임신·출산·육아 시기에는 부업 전선에 뛰어든다. 고로 회사 다닐 때부터 부업의 밑그림을 그려놓는 것이 현명하다. 사. 아이가 초등학생이 될 무렵, 나는 마흔 살쯤 되니까, 그때쯤 취업 전선에 복귀하면 딱이겠다. 어차피 늘 남자 동료들보다 나이가 많이 어려 쓸데없는 일로 부대끼지 않았는가. 나이가 적당히 든 것이 오히려 편하겠다. 오. 남편네 회사는 평균 퇴출 연령이 40대 중반이니까 나랑 바통 터치하면 딱 맞는다. 그 나름의 제2의 인생을 설계할 수 있을 듯하다. 리스크가 있다 해도 마누라의 월급으로 그간 어떻게든 버틸 터이니 돈 워리 비 해피. 어떤가, 이만하면 똥도 버릴 데 없이 야무진 계획이 아닌가?

씩씩하게 회사를 다니면서 임신하고 출산해서 키우는 여자들도 많지만 난 그렇게 풀가동할 자신이 없다. 직장 초년생 때, 늘 근무 시간에 아이와 통화하고, 아이 문제 때문에 일찍 귀가하며 일을 소홀히 했던 여자 팀장이 하루아침에 잘렸던 것을 선명하게 목격해서였을까? 회사 눈치를 보면서 병원검사 다니는 것도 싫었고 아이에게 미안한 것도 싫었고, 내 몸과 마음이 힘들 것도 피하고 싶었다. 또 뭣 하나 소홀히 하기 싫었고 이왕 할 거면 뭐든지 최선을 다해 집중해서 잘하고 싶었다. 모성에 대한 동경도 무시 못했다. 몇 해 전에 돌아가신 친정엄마가 어렸을 적, 무더운 여름날 하교하면 목욕 시켜주신 뒤 베이비 파우더로 보송보송 말려주시던 그 감촉은 아직도 마음을 보듬고, 엄마가 예전에 차려준 밥상을 기억해내고 나 또한 지금 밥상을 차리고 있으니까. 주변에서 강요 안 하는 자발적인 모성은 행복하고 아름답다.

자, 여기까지가 “왜 멀쩡한 회사 다니다가 굳이 그만뒀냐”에 대한 대외적인 스토리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데 이렇게 부산을 떠는 것은 원래 계획 세우고 실천하는 것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피곤한 성격 탓도 있지만, 실은 누가 시키지도 않는 만큼, 누가(자세히 말하자면 국가와 기업과 매스컴과 남자들이) 도와줄 리도 만무했기 때문이다. 국가는 맞벌이 현실과 육아 문제의 밸런스를 해결 못하고 있고, 기업들은 ‘저출산’을 알량하고 쫀쫀한 마케팅 도구로 삼을 뿐이며, 매스컴은 희생하는 모성과 능력 있는 자립심을 동시에 찬양하며, 남편은 나를 끌어안고 “귀찮으면 하지 마”라고 사랑스레 속삭였다. 그런 현실 속에서 내가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아무리 봐도 무리였다.

‘슈퍼맘’을 위로하고 싶지만 죄송~

국가와 기업과 매스컴과 남자들이 나의 출산·육아가 진행될 향후 5년간 얼마나 변화될지는, 통상 한 회사의 5개년 사업계획이 얼마나 보수적으로 야박하게 짜이는지를 보면 대충 예상하고도 남는다. 그런 가운데 나는 날아다니며 가랑이 찢어지는 ‘슈퍼맘’이 될 생각이 없었다. 슈퍼맘으로 무리하면서 동시에 죄의식에 허덕이기에는 난 너무나 이기적인 여자다. 하는 수 없이 슈퍼맘의 길을 힘겹게 가는 그녀들에게는 심심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드리고 싶지만 죄송, 전 그저 요리조리 미꾸라지처럼, 누구의 노여움도 사지 않고, 그저 마일드하게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런데 이를 어째. 문제가 생겼다. 나의 이기심(?)에 하늘이 노하셨는지 아이가 죽어라 안 생긴다. 스케줄 완전히 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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