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에서 열린 포르쉐 월드 로드쇼에서 원없이 한번 ‘밟아본’ 김보협 기자… 잠재 고객을 사로잡는 영리한 쇼케이스… 국산차 로드쇼는 어디 없나요
▣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내 속도의 청춘은 그날 이후 끝난 줄 알았다. 중학교 3학년 때 일이다. 학업에 뜻이 없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는데 어느 날 한 친구가 낡은 오토바이를 끌고 나왔다. 간단한 조작법만 듣고 대책 없이 큰길로 나갔다. 질풍노도의 시대와 오토바이가 만났으니 어땠겠는가. 천변도로를 미친 듯이 달렸다. 무서웠다. 그런데도 몸은 속도를 즐기고 있었다. 점점 더 빨라졌다. 손이 뇌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것 같았다. 뒤따라오던 자동차의 경적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지 않았더라면 3~4m 아래 개천에 곤두박질쳤을 것이다. 그날 이후 속도에 관해서는 난 늙어버렸다.
뭐, KTX보다 더 빠르다고?
아직도 욕망이 꿈틀대고 있다는 걸 스포츠카를 타보고 알았다. 3월26일 강원도 태백에서 열린 포르쉐 월드 로드쇼에서다. 차에 관심은 많았지만 자동차 관련 취재는 처음이었다. 그저 ‘쇼’라고 생각했다. 대~충 차를 보여주고, 대~충 몰아보겠지 머 그까이꺼 하고 갔다. 솔직히 포르쉐가 독일차라는 사실, 카레라·카이맨·카이엔·복스터라는 대표 상품이 있다는 것을 현장에서 알게 됐다. 그곳에 온 마니아들은, 구체적인 사양까지 비교해가며 전문용어들을 쏟아냈다. 기자라고 소개하니, 자신은 ○○○ 자동차 전문기자의 시승기를 즐겨본다며 더 기를 죽였다.
밟으니까 잘 나가더라, 회전할 때 쏠림이 없더라, 승차감이 죽이더라는 식의 그러저러한 시승기는 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외제차 광고성 기사를 쓰는 일은 내키지 않았다. 서울 가는 길이 걱정돼 오전에 휙 둘러보고 서두를 참이었다. 그런데 재미가 있었다. 처음엔 ‘이런 별세계가 다 있네’ 싶다가 어느새 다음 프로그램이 궁금해지면서 빠져들었고, 마침내 ‘왜 국내 자동차 회사들은 이런 행사를 하지 않는 거야’로 이어졌다.
포르쉐는 3월18일부터 31일까지 열린 이 행사를 위해 독일에서 포르쉐 21대를 실어왔다. 대만에서 행사를 한 뒤 한국으로 왔고, 다시 중국으로 건너갈 것이라고 했다. 2005년 한국에 130여 대를 팔았고 올해는 200대 이상으로 목표를 올려잡았다.
아침 9시께 태백 준용 서킷에 도착하니 주차장에서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벤츠, BMW, 아우디 등 외제차들이 즐비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잠재 고객’ 위주의 행사였던 것이다. 어느 자동차 광고처럼 ‘대한민국 1%’ 중에 포르쉐 마니아들이 모인 셈이다. 50여 명 중에 기자는 5명 정도였다.
전남 목포에서 왔다는 한 참가자는 내게 정중하게 물었다. “포르쉐를 타고 서해안고속도로에서 311km까지 밟아봤는데 타이어를 갈고 나니 그렇게 안 나옵니다. 타이어에 따라서도 그렇게 차이가 납니까?” 우이씨, 포르쉐가 KTX보다 더 빠르다니. 나도 궁금해서 물었다. “나이도 지긋하신데 2인승이면 가족들은 어디에 태웁니까?” “아, 포르쉐는 세컨드카 개념이거든요. 가족들 같이 타는 차는 따로 있고 포르쉐는 거의 혼자 타죠. 스트레스 풀 때 혼자 몰고 나가요. 제 개인 장난감이라고나 할까요?” 허걱, 최소 1억원인데 집 한 채 값의 장난감이라니…. 대화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난 파란팀에 배정받았다. 이름표 뒷면 일정표를 보니 오후 5시까지 빡빡했다. 로드투어, 핸들링, 오프로드, 슬라럼(Slalom), 브레이킹 등 5가지 프로그램이었다. 5개팀이 70분씩 한 프로그램씩 엇갈려 소화하는 방식이었다. 프로그램 이름도 그렇고 각 팀에 강사들이 배치되어 있어 꼭 운전 강습학원 분위기였다.
“이건 18평, 저건 24평” 차를 집처럼 불러
우리 팀의 첫 프로그램은 로드투어였다. 실제 국도를 달리는 프로그램이었다. 2.5km 트랙이 있는 태백 서킷에서 나와 태백산 도립공원 주차장까지 왕복 30km를 갔다왔다. 2명씩 짝을 이뤄 자기가 원하는 모델에 올라탔다. 난 지붕이 없는 ‘뉴911 카레라 4 카브리올레’를 골랐다.
차는 내가 살고 있는 집 전셋값보다 비쌌다. 1억9700만원. 강사 이정헌(튜닝전문업체 오토 미디어 대표)씨는 “우리는 이렇게 불러요. 이건 18평, 저건 24평…”이라고 말했다. 로드투어는 머리와 꼬리 차량을 포함해 10대 정도 줄줄이 나갔다. 그 모습만으로도 장관이었다. 혹시 몇 중 추돌사고가 나면? 수억원이 깨질 판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미리 “적당히 즐기게 해드리겠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과속 방지용 카메라가 없는 구간에서는 선두 차량이 마구 밟았다. 표지판엔 시속 70km 이상 속도를 내지 말라고 쓰여 있었다. 허겁지겁 뒤쫓아가다 보니까 시속 170km를 넘나들었다. 가속력과 제동력을 느껴보라는 속셈이었다. 다른 스포츠카를 타본 적이 없어 비교할 수는 없었지만, 다섯을 셀 정도에 시속 100km에 도달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나중에 자료를 뒤져보니 4.9초란다.
옆자리에 앉은 타사 기자와 나는 감탄을 연발했다. 태백산 휴게소에 도착한 뒤 자리를 바꿨다. 가는 길과 오는 길은 영 딴판이었다. 길이 꺾어진 지점에서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나도 모르게 오른발에 힘이 들어갔다. 내 발이 브레이크를 찾고 있었다. 내가 운전대를 잡았을 때 그도 그랬을 거다. 우리는 만난 지 1시간도 안 되어 그렇게 서로의 목숨을 내맡기고 있었다.
오프로드는 스포츠실용차(SUV)인 카이엔을 가지고 진행했다. 도로가 아닌 거친 길에서 어떤 성능을 발휘하는지 경험하라는 취지였다. 우선 차를 오프로드 모드로 변환시켰다. 강사의 지시에 따라 단추를 누르니 차체가 10cm가량 높아지면서 차가 거친 길을 갈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시범을 보고 있을 때는 기가 막혀 웃음이 터져나왔다. 묘기 대행진 같았다. 한 바퀴가 상당히 깊이 파인 웅덩이에 처박히고 나머지 세 바퀴가 허공에 떠 있는 데도 차는 문제없이 빠져나왔다. 웅덩이 여러 개를 연달아 지나자 차는 앞뒤와 옆으로 시소를 타는 것처럼 크게 출렁거렸다. 저런 경사의 자갈길을 올라갈 수 있을까 싶었는데 막상 해보니 올라갔다. 내리막에선 브레이크를 잡지 않아도 알아서 제동이 됐다. 강사가 무슨무슨 시스템으로 어떤 원리에 의해 그리 되는지 복잡한 설명을 했지만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신기할 뿐이었다.
깊은 웅덩이도 마음대로, 묘기 대행진!
핸들링은 트랙에서 ‘효과적인 코너 공략법’을 익히는 프로그램이었다. 강사와 한 차례 트랙을 돌고 나머지 두 바퀴는 참가자들이 직접 몰았다. 레이서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내 차라면 시도조차 하지 않을 급가속, 급제동을 반복하면서 트랙을 돌았다. 브레이킹은 비상 상황을 가정한 프로그램이었다. 짧은 거리에서 시속 95km를 얻기 위해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았다. 그리고 표시가 있는 곳에선 브레이크 페달을 마찬가지로 밟았다. 내 차에 길들여진 대로 몸은 자꾸 미리 브레이크 페달로 발이 갔다. 양쪽 페달을 번갈아 있는 힘껏 밟아대자 몸 안에서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강사는 여러 차례 “차를 믿으세요”를 반복했다. 정말 내 믿음대로 움직였다.
참가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슬라럼이었다. ‘콘’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코스를 주파하는 게임이었다. 콘을 하나 쓰러뜨릴 때마다 벌점 1초가 더해졌다. 은근히 경쟁이 달아올랐다. “이런 행사는 처음이어서… 하하하” 내숭을 떨었지만, 속으로는 ‘무사고 경력 14년차의 실력을 보여주마’고 다짐했다. 믿음대로는 되는데 마음대로는 되지 않았다. 속도를 지나치게 내면 코스를 벗어나 실격하거나 콘을 무지하게 쓰러뜨릴 것 같았다. 다행히 성적은 공개되지 않았다.
주최 쪽은 마지막 서비스를 잊지 않았다. 액션영화의 도주 장면 연출. 트랙을 고속으로 달리다 급회전을 하면 차가 옆으로 미끌어지는(쟁이들은 ‘드리프트’ 기술이라고 불렀다) 상황을 재연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기술이라서 독일에서 온 강사 3명을 포함해 강사들이 운전대를 잡고 잠재 고객들은 옆에 탔다. 시속 200km를 넘나들었다. 신났다. 한 번 드리프트를 하고 나면 다음날은 새 타이어를 끼워야 한다고 했다. 한국 포르쉐 공식 수입사인 스투트가르트 스포츠카(주)의 마이클 베터 사장까지 자신의 차를 직접 몰고 나와 고객을 맞았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슬라럼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참가자들의 시상식이 열렸다. 상품은 어른 손바닥 크기의 포르쉐 모델이었다. 얄밉지 않게 장사를 했다. “매일 아침 물을 주면 조금씩 자란다. 성질이 급해 참지 못하겠다면 사인하러 오라”고 했다. 이런 말도 덧붙였다. “오늘 여러분들이 몰아본 자동차는 이 행사를 위해 따로 만들거나 특정 성능을 향상시킨 게 아니다. 언제나 매장에서 구입할 수 있는 모델이다.”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하루짜리 욕망, 현실로 돌아오다
한국은 이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자동차 생산대국이다. 외국에서도 한때는 ‘싼 차’였지만 여느 자동차에 비해 손색이 없는 성능을 갖췄다고 호평받는다고 들었다. 자랑과 재미를 적당히 섞어 잠재 고객의 소유욕을 불러일으키는 이런 방식의 로드쇼를 왜 하지 않을까 궁금했다. 아슬아슬하게 입은 여성들을 장식품으로 세우는 신차 발표회보다는 훨씬 유용할 것 같았다. 물론 적지 않은 경비가 들겠지만 참가를 원하는 사람들에겐 실비 정도의 참가비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포르쉐 쪽은 11만원의 참가비를 받았다. 현대기아, 대우, 삼성차들의 로드쇼가 보고 싶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의 애마 카렌스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금세 카레라의 굉음이 그리워졌다. 스포츠카를 갖고 싶을 때는 돈이 없었고, 차를 가질 만한 경제력이 생겼을 땐 딸린 식구들이 많았다.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한 욕망은 하루짜리로 접어야 했다. 빨리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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