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승/ 한국과학기술원 교수·바이오시스템학과
크리스마스 즈음에서부터 해가 바뀌는 연말연시까지, 이맘때가 되면 갖가지 모임이 줄을 잇는다. 가족친지 모임, 친구들이나 동창 모임, 직장 동료들과의 공식 송년회 등, 달력엔 깨알 같은 스케줄이 빼곡히 쌓인다.
남자 요리사가 고기를 썰어주는 이유
어디서 송년회를 하느냐에 따라 모임의 성격이나 만나는 사람들의 인간관계가 짐작되기도 한다. ‘삼겹살에 소주’가 어울리는 모임이 있는가 하면,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와인을 곁들인 모임도 있고, 중국식 코스 요리 정도는 돼줘야 하는 모임도 있을 것이다. ‘당신이 먹은 것이 무엇인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는 프랑스 미식가 장 앙텔므 브리야 샤바랭의 말을 넘어, 당신들이 함께 한 식사가 무엇인지 알면 당신들의 관계를 말해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렇게 사람들이 음식점에 많이 몰리다 보면, 불쾌한 풍경 하나가 있는데 우리 사회의 고질병이라 불리는 ‘빨리빨리’ 문화가 그것이다. ‘회전’을 생명으로 하는 식당들은 손님이 들어서자마자 전 손님들의 테이블을 치우며 서둘러 주문을 받는다. 메뉴판을 보며 고민하는 손님들 앞에서 짜증난 표정으로 ‘우리 집에서 감자탕이 유명하니까 그냥 ‘중’자 하나 시키면 될 것 같다’며 직접 주문까지 해주신다. 거기에다 ‘맵지 않게 해주세요’라든가 ‘고추는 덜 넣고 감자는 많이 넣어주세요’라고 부탁이라도 하면 혼날 분위기다. 요즘엔 어찌나 빈 접시를 금방 치워주시는지, 추가 주문을 하지 않을 거면 나가라는 태세다. 한 테이블당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우리들의 대화와는 상관없이 식당에서 정해준다.
이런 분위기는 심지어 뷔페식당에서도 마찬가지다. 길게 늘어선 줄에서 종종걸음으로 음식을 덜어야 하는 손님들은 고기를 썰어주는 요리사 앞에서도 아무 말 없이 주는 대로 고기 한 점을 받아야 한다. 심지어 요리사는 미리 썰어놓은 고기를 접시에 올려놓고, 손님들에게 젓가락으로 하나씩 짚어가도록 한다. 군대나라 대한민국답게 바비큐
요리사가 ‘배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낯익은 풍경을 다른 나라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고기를 썰어주는 행위는 그 자체가 요리의 한 과정으로서 ‘어느 부위를 어떻게 익혀 썰어주느냐’를 주문받기 위해 요리사는 바비큐 앞에 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기를 썰어 나누어주는 풍습은 1500년대 중반 이탈리아의 요리사 크리스토포로 데 메시스부고에게로 올라간다. 고대나 중세에도 고기를 썰어주는 문화는 있었지만, 메시스부고는 이런 행위를 요리사의 전문 기술로, 더욱이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사람이다. 그는 젊은 남성들을 이 분야의 전문가로 교육해 식탁에서 가장 품위 있는 일 중 하나로 발전시켰고, 이탈리아를 ‘썰기 예술의 전통적인 나라’로 만들었다. 오늘날에도 고기를 썰어주는 요리사가 모두 남자인 이유는 바로 이 전통 때문이다.
시시콜콜한 주문, 돌 맞을라
고기를 썰어주는 요리사는 손님이 오면 어떤 부위를 어떻게 익히는 것을 좋아하는지 물어보고 농담 섞인 대화를 통해 식욕을 돋운다. 그러면서 단조로울 수도 있는 식사에 즐거움을 더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여유 있는 장소에서조차 자신의 미적 취향을 당당히 말하지 못하고 손님의 요구사항에 귀기울여주는 문화가 없다는 사실은 가슴 아픈 일이다. 주는 대로 먹어야 하는 ‘배식 문화’에 익숙한 나라여서 그럴까? 맥도널드 주문대 앞에서도 ‘양파는 빼주시고, 토마토 슬라이스는 두 개를 넣어달라’고 요구하는 서양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더더욱 그렇다. (우리나라에선 그렇게 주문하면 뒷사람한테 돌 맞는다.)
제안하건대 올 연말연시 모임에선 인터넷이나 귀동냥, 혹은 도시여행 책을 통해 사람들이 별로 몰리지 않으면서 손님의 시시콜콜한 주문에 귀기울여주는 곳을 발견해보면 어떨까 싶다.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여유 있게 음식도 즐기면서 새해를 차분하게 맞이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미식가 브리야 샤바랭이 이런 말도 하지 않았던가! 새로운 음식의 발견은 새로운 천체의 발견보다 인류에게 더 값진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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