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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유대의 위력 | 정재승

등록 2005-11-18 00:00 수정 2020-05-03 04:24

▣ 정재승/ 한국과학기술원 교수·바이오시스템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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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살면서 힘들 때 언제라도 달려와줄 친구를 3명만 두어도 성공한 인생’이라는 말을 100번도 넘게 들으며 자랐다. 내가 언제라도 믿고 의지할 수 있고 어떠한 순간에도 내 편이 돼줄 친구. 그들은 내 삶의 큰 힘이자 위안이며 피난처다.

다른 세계 사람이 열어주는 문

‘친구들 사이의 우정’을 강조하는 또래 문화는 어느새 인맥을 강조하는 패거리 문화로 그 범위가 조금씩 확장된다. 학창시절부터 점심식사 시간이 되면 늘 정해두고 밥을 같이 먹는 친구들이 있고 서로의 생일을 챙겨주는 또래 집단이 있다. 버젓한 또래집단 하나에 속하지 못하면, 굳이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지 않더라도 ‘왕따’가 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사회에 나가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정기적으로 식사를 같이 하고 술 한 잔씩 걸치는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서로의 경조사를 챙기는 지인들이 있다. 지금 이 순간 갑자기 내 절친한 친구들이 몇 명쯤 되는지 궁금해졌다면, 싸이월드의 일촌 관계를 클릭해보시라.

이처럼 사람들은 절친한 유대관계에 대해서는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인간관계의 또 다른 필수 요소인 ‘약한 유대관계’의 사람들, 다시 말해 ‘그냥 아는 사이’들에 대해서는 별로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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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회학자 마크 그래노비터 박사가 1970년대 초에 내놓은 연구결과를 보면 ‘그냥 아는 사이라고 무시하면 큰코다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수백 명의 직장인들을 인터뷰하면서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 일자리를 찾았는지 조사했다.

그 결과 개인적인 접촉을 통해 일자리를 찾는 사람은 전체 응답자의 56%였는데, 이들 중 자주 만나는 친구로부터 일자리 정보를 얻었다는 사람은 17%뿐이었다. 55%의 사람들은 가끔 만나는 사람에게서 일자리 정보를 얻었으며, 아주 드물게 만나는 사람에게 정보를 얻었다는 사람도 28%나 되었다. 외부 세계와 의사소통을 하고 정보를 주고받는 데 ‘약한 유대관계’가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는 얘기다.

미국의 한 신문에서 ‘내 인생을 뒤바꾼 한 사람’을 조사해보니, 10위권 이내에 언급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별로 가깝지 않은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은 ‘나와 같은 세계에 사는 친구’보다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 제공해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약한 유대관계의 위력’은 사회적인 차원으로 넓혀도 여전히 유효하다. 노트르담대학 물리학과 알버트 라즐로 바라바시 교수에 따르면, 미국이 지금처럼 낙태 지지 분위기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약한 유대관계를 잘 활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낙태 찬반 논쟁이 한창이던 무렵, 낙태를 지지하는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다른 찬성 사이트들은 물론 반대파 사이트들까지도 자신의 사이트에 링크해 그들의 주장이 빠르게 전파되고 두 주장이 서로 비교될 수 있도록 노력한 반면, 링크에 인색했던 낙태 반대파 사이트들은 고립돼 그 영향력을 잃었다는 것이다. 반대파와의 약한 유대도 중요하게 활용한 전략이 유효했던 것이다.

파문, 논란, 일파만파…

우리 언론은 누가 무슨 발언만 해도 ‘파문’이나 ‘논란’, 심지어 ‘일파만파’라는 말을 쉽게 사용한다. 실제로 그 발언이 파문이나 논란을 일으키기 전에 미리 이런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논란을 조장한다. 이런 호들갑이 역겨운 이유는 우리 사회에 새로운 생각이 들어오면 그것이 성숙된 방식으로 논의되기도 전에 반대 의견을 가진 언론이 세를 규합하고 연대해 새로운 생각을 무조건 밀어내고, 다른 의견이라도 낼라치면 마녀사냥의 태세를 갖추기 때문이다.

‘엉뚱한 생각’도 너그럽게 받아들여지고, ‘잘못된 의견’이라면 자기모순으로 인해 스스로 소멸하는 사회. 그러나 어떤 생각도 제기될 수 있고 논의될 수 있으며 모든 의견이 결국 그 구성원을 성숙하게 만드는 사회. 우리가 ‘약한 유대’마저도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이룰 수 있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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