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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의 발견 | 박민규

등록 2005-11-04 00:00 수정 2020-05-03 04:24

▣ 박민규/ 소설가


한국의 정치는 왜 발전하지 않을까? 싸우지 않기 때문이다. 싸우지 않는다니, 싸움만 하다 볼 장 다 보는 게 우리의 국회가 아니었나 싶겠지만 그렇지 않다. 한국의 정치는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 멱살을 쥐고 고래고래 고함만 지르고 버팅기고, 그것은 드잡이지 싸움이 아니었다. 봐라, 우리가 싸우려 한다. 오늘 정말 사고 한번 크게 치겠다. 배짱의 모토는 국민이었다. 여론을 던져 뜯어말리는, 결국 참으라며 화해를 종용하는 국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늘 말려서 참는다로 결론은 끝나지만, 열이면 열 그들이 싸웠다고 누구나 기억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바로 한국식 정치가 발견한 드잡이의 효과다.

드잡이 말고, 결투를

말려서 참는다, 의 뉘앙스는 묘한 것이다. 스스로가 국민을 위해 ‘싸우려’ 했고, 국민을 위해 ‘참았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당당했다. 아니, 알아버렸다. 이렇게 하면 된다는 사실을, 소리치고 멱살만 잡으면 언제나 불안해하는 국민들이 있다는 사실을 체득하고 말았다. 명패를 집어던지고, 단식투쟁을 하고, 발길질과 저 무수한 집단행동의 비빌 언덕은, 실은 늘 그래서 국민이었다. 말리지 않았다면, 그들은 싸웠을까? 절대 싸우지 않았을 거라고 지금의 당신은 생각할 것이다. 세금을 내고, 국민연금을 내고, 이런저런 기금과 보험료를 납부하며 감, 잡았을 것이다. 이하동문이다.

발전한 것은 드잡이의 테크닉뿐이다. 우선 목소리가 커졌고, 클린치와 클린치 상태에서 나누는 귓속말이 발전했다. 어차피 싸울 게 아니므로 - 그들은 액션과, 스토리와, 시청률 경쟁에 열을 올렸다. 세(勢)의 확보는, 곧 그만큼 말려줄 사람이 많아진다는 의미였다. 이쯤 합시다, 이렇게 갑시다, 수고 많았습니다, 종종 드잡이를 하다가 섹스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싸우는 줄 알았더니). 3당 합당을 했을 때엔 다들 놀라서 말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3섬을 본 게 처음이었거든). 그들이 실은 부부였음을, 사실혼 관계의 부부임을 안 것도 그러나 우리로선 크나큰 발견이었다. 세금과, 국민연금과, 이런저런 기금과 보험료를 납부하며, 이제 우리는 그 사실을 발견해야 한다. 저들이 결코 싸우지 않는다는 것을, 저들은 결코 싸운 적이 없다는 사실을, 부창부수(夫唱婦隨), 우리의 정치는 그래서 결코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을.

싸움을 하기란 쉽지 않다. 막연히, 우리가 싸움이라 여겨온 행위의 대부분은 실은 드잡이거나 폭력이었다. 한국사의 비극이 거기에서 출발한다. 싸울 수 없거나 한 번도 싸우지 않은 우리의 정치가, 결투는 없고 일방적인 폭력과 드잡이만 있어온 우리의 정치가 지금의 국회를 만들어놓았다. 그래서 그들에겐 규칙이 없다. 그래서 그들에겐 예절이 없고, 그래서 그들에겐 두려움이 없다. 예절과 규칙이 발달한 나라는 실은 결투의 문화가 발달한 나라들이다. 그들이 신사여서 신사의 나라가 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이중적이어서 간이라도 빼줄 듯한 깍듯함을 지닌 것은 결코 아니다. 말 한마디 실수에 목숨을 건 결투를 해야 하고, 처신에 실패하면 배를 갈라야 했던 결투의 문화가 있어서였다.

말리지 않으니 난감하냐

이제 당신들도 싸워야 한다. 결판을 짓고, 발전을 해야 한다(메뚜기 귀에 랩을 읊는 심정이지만). 지금 한국에서 싸우지 않는 것은 당신들뿐이다. 세금을 내고, 국민연금을 내고, 이런저런 기금과 보험료를 납부하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싸우고 있는지 당신들은 알아야 한다. 아무도 당신들을 말리지 않는다. 서로 멱살 좀 그만 쥐고(금방 풀 거면서), 고함 좀 그만 지르고(불필요한 동작이라고 봐), 클린치, 클린치 좀 그만 하고(그만 속삭여), 이제 진짜 결판을 지어보란 말이다. 왜, 말리지 않으니 다리가 떨리냐? 난감 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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