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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여, 잘 있거라 | 박민규

등록 2005-08-05 00:00 수정 2020-05-03 04:24

▣ 박민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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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검은색 화면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다운이네. 컴퓨터에 일가견이 있는 친구도 몇 시간의 씨름 끝에 고개를 내저었다. 용산으로 가보자. 컴퓨터 본체를 들고, 전철을 타고, 신용산역과 전자상가를 연결하는 어둑한 터널을 지나, 그 사이사이 컴을 내려놓고 담배를 피워물던, 휴, 그때 본 하늘과 흰 구름을, 마치 윈도98의 부팅 화면과도 같았던 그 풍경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지우고 다시 깝시다. 지운다니, 글쎄 이 안에 정말 소중한 문서가 들어 있다니까. 어쩔 도리가 없네요, 이건 도스(MS-dos)의 문제라서.

윈도우의 배후에 있는 암흑의 세계

그때 알았다. 컴퓨터 그 자체라 믿었던 윈도가 실은 하나의 프로그램에 불과하다는 것을, 윈도의 배후에 실은 도스라는, 캄캄하고 손댈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그럼 실질적인 운영체제는 도스란 것입니까? 그렇지요. 명령어로만 작동한다는 그 언터처블의 흑막(黑幕)을 바라보며 세 편의 습작을 날린 나는 가슴을 쳐야 했다. 도대체 원인이 뭡니까? 글쎄요, 바이러스거나 사용자의 부주의 때문이죠. 사용자의, 부주의! 포맷한 컴퓨터를 다시 구동한 것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나서였다. 이틀 내내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서였다. 공부를 하거나 백업을 해. 친구의 충고는 얄밉도록 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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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도를 열다가도, 그래서 종종 나는 배후의 도스가 무서웠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도무지 나는 손도 댈 수 없는, 문제가 생기면 내 모든 걸 포기하고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캄캄하고 냉혹한 도스의 세계. 파일이 어지간히 쌓여갈 때면(부지런히 백업을 하면서도) 나는 하늘에 계신 도스 아버지, 기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 다운이네. 이윽고 마음이 무덤덤해진 것은 열댓번의 다운을 경험하고 나서였다. 윈도가 얼고 도스창이 뜬다 싶으면 나는 묵묵히 일상사처럼 포맷을 하기 시작했다. 커피물을 올려놓고 새 담배의 은박지를 뜯으며, 또 물끄러미 <방귀대장 뿡뿡이> 같은 어린이 프로라도 시청하며. 그러니까 포맷을 하시겠습니까? 예예, 예예예.

또 다운이네, 정치와 재벌과 유착과 도청이 버무려진 뉴스를 보면서 나는 중얼거린다. 이제는 묵묵히, 마치 일상사처럼. 이윽고 마음이 무덤덤해지는 이유는 여지껏 이 나라의 윈도가 다운되는 광경을 열댓번도 넘게 보아왔기 때문이다(뭐야, 이 축소은폐의 느낌은). 엿 같은 사실은 우리가 ‘대한민국’이라 믿고 있는 이 윈도가 실은 하나의 프로그램에 불과하다는 것- 실은 도스라는, 우리는 본 적도 다룰 수도 없는 운영체제가 실질적인 우리의 ‘대한민국’이란 사실이다. 순간 윈도가 어는 소리, 소중한 문서 몇개가 또다시 사장되는 마음의 소리, 게양된 조기(弔旗)를 바라보는 느낌의 이 슬프고 쓸쓸한 심장 소리. 백업은 받아뒀냐? 이민 가는 친구의 얼굴에 스치는, 이 얄밉고도 실질적인 충고의 소리.

대한민국, 포맷하시겠습니까?

이제 도스에 계신 당신들에게 나는 할 말이 없다. 아니, 우리는 그 사실을 경험으로 그만 터득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바이러스입니다, 불순분자 웜이 이 사회를 선동하고 있습니다, 하드에 파티션을 치지 그랬어요(지역감정으로 한 시절 넘겼지)? 그래도 나라의 안녕을 위해, 또 사용자의 부주의란 말에 오히려 동동 발을 굴린 것은 우리였다(금까지 모아서 줬잖아). 아니, 그래서 이 순간 당신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이제 우리에겐 공포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상하게도, 그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잘 있거라 도스여, 이제 우리는 비로소 쿨해진 느낌이다. 어, 다운이네. 그리고 묵묵히 포맷을 할 준비가 21세기의 형태장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네 눈엔 내가 아직도 ‘한국인’으로 보이니? 어쩌면 포맷은 이미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포맷하시겠습니까? 예예, 예예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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