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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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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요, 저요, 저요…

등록 2005-06-01 00:00 수정 2020-05-03 04:24

▣ 고경태/ 한겨레21 편집장k21@hani.co.kr


“저요, 저요, 저요….”
초등학교 저학년 수업시간의 시끌벅적한 풍경입니다. 선생님이 문제를 칠판에 적어내기 무섭게 꼬마들은 경쟁적으로 손을 흔듭니다. 이 광경을 엉뚱한 곳에 대입해봅니다. 풀리지 않는 과거사 문제를 칠판에 적어놓고 다음과 같은 식으로 묻는 겁니다.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 이거 고백해볼 사람?” 하지만 머리 굵은 어른들은 말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썰렁한 시추에이션입니다. 고백할 인간들이 마구 나선다면 과거사 조사를 둘러싼 소모적인 갈등은 없겠지요.

예외의 경우도 있습니다. “저요, 저요” 하며 손을 흔들어도 안타깝게 문제 풀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겁니다. “내가 몹쓸 짓을 했다”고 충격적인 주장을 하는데도 믿어주지 않습니다. <시사저널>이 지난 4월 중순에 표지로 보도한 ‘김형욱 양계장 분쇄기 살해설’이 그렇습니다. 동종업계 매체의 보도 내용을 놓고 왈가왈부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국정원의 김형욱 실종사건 중간조사 결과가 다른 쪽으로 나왔다는 걸 상기시키려는 의도도 아닙니다. 여전히 진실은 속시원하지 않습니다. 의문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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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기자들도 그동안 이 사건의 사실관계를 밝히기 위해 뛰어왔습니다. 5월 초순경 <한겨레21>은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국정원이 김형욱 실종사건과 관련해 양계장설과는 전혀 별도의 확정적인 단서를 찾아냈다는 것과, 이를 조만간 발표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더불어 국정원의 핵심 간부가 살해 당사자를 직접 만났고 ‘사체처리’에 대한 마지막 고백만을 남겨놓고 있다는 고급 정보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한겨레21>은 그 보도 여부를 놓고 고심했음을 밝힙니다. 그러던 와중에 국정원 안팎에서는 헛소문이 돌았습니다. “<한겨레21> 아무개 기자가 김형욱 사건의 전모를 취재해서 기사까지 다 작성해놓았다”는…. 다른 매체 기자들도 각종 루트를 통해 취재원과의 물밑 접촉을 시도하던 때였습니다.

5공 시절의 대학생 강제 징집과 관계된 군 기밀문서는 그 과정에서 입수됐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한겨레21>은 김형욱 사건을 취재하며 녹화사업 문서를 덤으로 얻게 된 셈입니다. 이걸 읽다 보면 일상적인 납치범죄가 판친다는 멕시코와 콜롬비아가 우습게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이런 시추에이션을 상상해 보십시오. 청와대, 국방부, 내무부, 문교부, 보안사, 병무청, 안기부 이렇게 7개 기관의 악당 대표가 80년대 교실에 모였습니다. 선생님이 물어봅니다. “대학생 납치 공작에 가담할 사람?” 일곱명 모두 손을 흔듭니다. “저요, 저요, 저요….”

PS. 김형욱의 친필도 단독 입수(?)했습니다(사진). 한겨레신문사 정보자료실에서 발견한 겁니다. 1972년, 중정 부장에서 물러나 있던 김형욱씨가 송건호 당시 <동아일보> 논설위원에게 증정한 <공산주의의 활동과 실제>라는 책이었습니다. 그의 사인을 보며 기분이 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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