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수연/ 소설가
일본은 왜 저럴까? 미국은? 왜 다른 나라와 사람들을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일까? 그 일본과 미국은, 국가인가 국민들인가, 아니면 현재 집권하고 있는 정치인들인가?
일본이나 미국에 다녀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미국인과 일본인들이 얼마나 친절하고 겸손하며 질서를 잘 지키는지. 길을 물으면 자기가 왔던 길을 반도 넘게 되돌아가면서 안내해주고, 눈만 마주쳐도 미소짓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항상 몸가짐을 조심한다고. 우리가 텔레비전으로 보는 번쩍거리는 대중문화는 그들의 껍데기일 뿐, 차분하게 갈고닦아온 저력이 있다고. 건전한 시민의식. 맞다, 배울 건 배워야 한다.
마지막 구명보트의 선장들
그런데 왜 그분들이, 선량하고 온화한 그분들이 국제적으로는 패악과 억지를 삼가지 않을까? 우리가 만난 그분들 말고 다른 사나운 일본인과 미국인들이 고이즈미와 부시를 당선시켰을까? 아니다. 이라크 전쟁을 지지했던 90%의 미국인들, 다케시마의 날을 선포한 시마네현 주민들을 다 심성이 나쁘다고 매도할 수는 없다. 아마 그들도 개인적으로 만나면 좋은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이 그분들이다. 무엇이 그분들을 눈도 귀도 없는 듯한 무도한 무리들로 돌변시키는가?
내 생각에는 위기의식일 것 같다. 이라크 전쟁이 자유세계를 수호하기 위한 성전이며 대테러전이고, 다케시마 주장이 자학적 역사관을 극복한 자존심의 회복이라는 극우의 선동을 말 그대로 믿지는 않더라도, 자기 나라의 상황에서 어쩔 수 없다는 공감대가 있기 때문에 다수가 따라가지 않을까. 경제에는 돌파구가 필요하고 중국은 무시무시하게 압박해오며, 국제 판도는 급변한다. 지금 모든 나라가 다 자기 생각에는 위기에 처해 있다. 고이즈미나 부시를 비롯한 호전적 정치인들은 모조리 마지막 구명보트의 선장들이다. 국민 개개인은 사느냐, 죽느냐 선택의 기로에서 양심도 예의범절도 내던져버리고 필사적으로 구명보트에 매달린다.
국가란 생명체와 같아서 끊임없이 팽창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식민주의 시대 강박관념이 아직도 지구를 옥죄고 있다. 우리라고 예외는 아니다. 우리는 약소국이고 분단 상황이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는 못할 짓이 없다는 사고방식은 우리가 욕하는 패권국가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 우리가 강성하고 부강해진다면 과연 그들과 달리 행동할까? 글쎄. 우리는 베트남에 충분히 사과했고, ‘만주 땅은 우리 것’이라는 유행어를 역사적으로 검증해보았는가? 이라크에 한국군을 파병할 때, 일부 언론들은 미국의 강요에 떠밀린다는 수동적인 생각을 버리고 세계 질서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석유자원을 확보하자고 주장했다. 비현실적인거야 둘째치고, 이것이야말로 아(亞) 패권주의다. 그렇다면 뒤집어서, 일제 식민지나 독도 분쟁에 대해 우리가 울분을 터뜨릴 근거는 무엇인가? 우리가 힘만 있다면 상대방에게 똑같은 짓을 할 수도 있었는데.
조금만 여유가 있어 서로 착하게 살면 좋을 텐데, 그럴 만한 조건이 된 적이 없다오. 우리 인간들은 모두 시대나 상황의 들러리, 줄에 조종당하는 인형, 희생자. 개인적으로 나쁜 사람이야 있겠소만,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은 너무 잔인해. 어쩌겠소?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자기에게 주어진 사회에서 까라면 까고, 일하라면 하고, 소비하라면 돈 쓰고, 너하고 나하고 싸우다 죽으라면 죽는 수밖에. 신도 지성도 가치도 잃어버린 21세기 인류의 보편 질환. 허무주의.
얼마 전 ‘제주작가회의’는 4·3항쟁을 기념하는 문학행사에 멀리 팔레스타인의 작가들을 초청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알다시피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 점령당해 신음하고 있다. 제주의 김수열 시인은 말했다. 고통을 당한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우리의 이해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줄 수도 있다면, 어찌 우리가 과거에 당한 고통이 부당하고 억울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나. 그것은 우리를 비틀어 짜는 모든 제도와 구조를 향해 날아가는 불타는 선언이었다. 나는 제주에서 내가 인간이라는 데 자부심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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