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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공간] 추억의 종, 사라지다

등록 2005-04-13 00:00 수정 2020-05-03 04:24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산불은 ‘움직이는 생물’ 같다. 4월4일 밤 양양군 양양읍에서 시작된 산불은 강원도의 많은 숲을 단숨에 먹어치우며 동쪽으로 동쪽으로 계속 내달렸다. ‘화마’라고 했던가? 이 괴물은 매끈하게 뻗은 7번 국도를 훌쩍 뛰어넘어 5일 낮 동해안 절경 지대에서 1천여년을 터잡아온 고찰 낙산사를 허무하리만치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산불이 진행되는 동안 인터넷 공간에는 낙산사가 무사하기를 기원하는 글들이 줄을 이었다. 낙산사는 단골 수학여행 코스였고, 남도 출신 시골뜨기 중·고생들에게 난생처음 ‘태평양’을 접하게 한 추억의 공간이었다.

“수학여행 때 낙산사의 동종을 보면서 한국의 전형적인 종의 형태를 배웠어요. 군청빛 바다가 내다보이던 낙산사의 옆모습,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았는데 수년 만에 보는 모습이 불에 타는 모습이라니….”(네이버 ‘hotbany’)

네티즌들은 목조건물은 그렇다 치고, 동종까지 잿더미로 변해버릴 줄은 몰랐다고 황망해했다. 보물 479호인 낙산사 동종은 1469년 조선 예종이 아버지 세조를 위해 제작한 것으로 원통보전과 함께 낙산사를 대표하는 명물이었다. 구리와 주석이 섞인 동종은 순철로 만든 현대의 범종보다 녹는점이 낮다. 1980년대에 순철로 만든 주변의 새 범종과 달리 동종이 이번 화마를 견뎌내지 못한 것은 이런 까닭이다. 낙산사의 대웅전 격인 원통보전과 홍예문 등 여러 문화재도 가뭇없이 사라졌다. 이제 그 참사를 지켜본 7층 석탑만 황량한 낙산사를 지키고 있다.

이번 산불은 봄철 양양과 간성 사이로 부는 초속 20~30m의 강풍인 ‘양간지풍’에 몸을 기대 사나워졌다고 한다. 더욱이 바람은 해발 1천m가 넘는 태백준령을 넘으며 고온건조해져 있는 상태였다. 지금 다시 수학여행 사진을 들춰본다면, 당신의 옷자락이 양간지풍에 휘날리고 있을지 모른다.

문화재청은 7일 30억원을 들여 낙산사를 원형대로 복원하겠다고 밝혔다. 조선시대의 걸작품으로 손꼽히는 동종은 6개월 안에 복원된다. 재료는 물론 소리까지도 되살릴 수 있다고 한다. 낙산사의 불은 이번이 5번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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