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명인/ 주간
불과 몇달 전 노무현 정권을 묶었던 사슬을 끊어준 헌법재판소가 이번엔 거꾸로 노무현 정권의 발등을 찍었다. 사법부의 최고기관인 헌법재판소는 한해에 연거푸 두번이나 입법부의 정치 행동에 제동을 거는 데 성공함으로써 대한민국이 명실공히 절차적 민주주의를 철저히 준수하고 삼권분립 정신이 살아 있는 민주공화국임을 만천하에 입증해 보였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기뻐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행정수도’ 판결, 민주주의에 기여
비아냥이 아니다. 이는 그 내용이야 어떻든 한국의 민주주의가 견제와 균형의 논리를 획득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한국 사회가 어떤 맥락에서든 절차적 정합성을 제대로 통과하지 않은 공적 행위의 수행을 허락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분명히 주목할 만한 진전이다. 하나의 명백한 룰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관습헌법’이라는 어딘가 충분히 납득이 가지 않는 법리에 의해 ‘행정수도 이전’이라는 사실상의 고도의 통치권적 결정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사실은 확실히 낯설고 어느 정도는 불만스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어쩌면 현재 헌법재판소를 구성하고 있는 헌법재판관들의 보수적 성향이 법리 이전에 예단적으로 작동하여 사후에 ‘관습헌법 준수’라는 법리를 구성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순수한 헌법적 판단이 아닌 일종의 ‘사법 반란’으로 볼 여지도 적지 않다. 노무현 정권에 대한 저항세력의 최근의 기세나 행동거지로 보아서도 어쩌면 일종의 음모론적 추론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추론이고 심증일 뿐 결과는 그렇게 나왔고, 이는 다시 움직일 수 없다. 군사독재 시절처럼 헌법재판관들을 잡아다가 고문할 수도, 그들의 뒷조사를 해서 비리를 캘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젠 정말 ‘법대로’ 할 수밖에는 없다. 그리고 이 ‘법대로’라는 것에서 비로소 민주주의 정치제도 아래서 갈등하는 여러 세력간의 힘의 각축이 본격적으로 가능해지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은 분명 곤경에 빠졌다. 처음에 기획했던 개혁적 행보는 벌써 여러 곳에서 저항에 부딪쳐왔고, 이번 행정수도 이전 위헌 판결로 다시 한번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노무현 대통령은 지금 장고에 들어갔을 것이다. 이 난국을 또 어떻게 ‘돌파’할 것인지를 숙고하고 있을 것이다. 일개 서생의 말이 그의 귀에 들어갈 리는 없겠지만 이 국면에서 한마디 충고를 하고 싶다. ‘돌파’하겠다는 생각을 먼저 버리라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권한의 한계 내에서 법률과 절차에 입각하여 하나하나 차근히 문제를 추진하고 해결해나가라는 것이다.
나는 노무현 정권이 여러모로 그다지 진보적인 정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어쨌든 현재의 정부 여당 안에는 ‘진보적이었던’ 많은 인사들이 포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그 ‘진보적이었다’는 표지는 대통령을 위시해서 강점이 아니라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과거 반민주적 역대 정권과 투쟁하면서 얻은 그 ‘진보성’ 안에는 그들이 맞서 싸웠던 적의 모습이 상당히 많이 드리워져 있다. 싸우면서 적과 많이 닮아갔던 것이다. 절차나 설득보다는 구호와 선전이 앞서고 어설픈 전략전술이 더 선편을 잡는 일종의 음모적 발상이 바로 그것이다. 왜 선언부터 하고 나서는가. 왜 유인물부터 뿌리고 구호부터 외치는가. 1970~80년대 학생운동을 하는가. 그것은 낡은 시대의 유산이다.
‘돌파’하지 말고 ‘우회’하라. 위기에 몰린 적은 더욱 완강하다. 하지만 시간은 진보의 편이다. 철저히 룰을 지키고 국민적 동의를 획득해나가면서 한꺼번에 장군을 부르려 하지 말고 눈앞의 졸병부터 먼저 내 편을 만들어나가라. 행정수도 이전계획은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무조건 승복하라. 그리고 그 깨끗한 승복의 대가로 현재 난관에 봉착해 있는 이른바 4대개혁 입법을 먼저 관철하라.
행여나 행정수도 이전으로 기득권층의 기반을 붕괴시키겠다는 발상은 이제 포기하라. 대신 국토균형발전이라는 더 큰 전략적 목표를 축으로 사실상 행정수도 이전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는 방안은 적지 않다. ‘천도’를 선언하지 않고도 천도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우리는 이 정권이 어떤 경천동지의 업적을 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 정권 이후의 앞날이 예측 가능한 것이 되게끔만 제발 천천히 한 걸음씩 내딛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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