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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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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대

등록 2004-10-07 00:00 수정 2020-05-02 04:23

▣ 배경록/ 한겨레21 편집장 peace@hani.co.kr

마음은 가볍고 선물 보따리를 든 양손은 무거워야 할 추석 명절에 무거운 마음과 가벼워진 양손으로 고향을 다녀온 뒤, 이제 날씨까지 쌀쌀해지니 사람들의 마음이 더욱 스산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주위에서 들리는 얘기는 온통 경기 침체와 관련된 것들뿐이다. “IMF 때도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먹고사는 문제는 외면한 채 정치권이 정쟁만 일삼고 있다” “졸업을 해도 걱정이 태산이다”라는 등의 하소연이 전국을 메아리치고 있다.

경기 침체를 반전시키기 위한 정부의 처방도 별로 특별한 게 없는데다 몇 가지 처방이라는 것도 약발이 전혀 먹히지 않는 답답한 시절이 이어지고 있다. 국민과 기업, 정부 사이에 경제 상황에 대한 인식의 차이도 커 반전이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반전의 결정적인 열쇠는 재벌들이 쥐고 있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많다. 삼성·현대·LG 등 10대 그룹이 보유하고 있는 현금성 자산이 지난 6월 말 현재 27조1066억원에 달하고 있고, 이 돈이 시중에 풀리기만 해도 경기 침체의 숨통을 틀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얼마 전부터 청와대와 관가, 정치권 주변에서 입소문으로 나돌고 있는 ‘경제 회생책’에 자꾸 마음이 끌리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조금은 엉뚱하기도 하고 그게 무슨 회생책이냐는 핀잔도 들을 만하지만 백약이 무효라면 한번 써봐도 좋을 듯싶기 때문이다. 그 회생책이란 노무현 대통령과 재벌 총수에 관한 것으로 단순명료하다. 노 대통령은 올해 1월과 5월 두 차례 재벌 총수들을 청와대로 불러 대기업들이 경제 활성화에 적극 나서줄 것을 당부했다. 재벌 총수들은 청와대를 다녀온 직후 앞다퉈 중장기 투자계획을 발표하는 것으로 화답했으나, 이를 실행에 옮기고 있는 재벌은 눈에 띄지 않는다.

이런 방식의 채근이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으로 판단한 노 대통령의 측근과 청와대 참모들은 5월 회동 이후 재벌 총수와의 독대를 노 대통령에게 여러 차례 건의했다고 한다. ‘재벌 공화국의 대통령’들을 한데 모아놓고 손 한번 잡아주고 밥 한 끼 먹는 것으로는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어렵다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재벌 총수들은 대통령과의 독대에 익숙하며, 독대를 통해 자신과 기업의 건재함을 과시하려는 습성을 파악한 것도 한몫했다.

측근과 참모들은 “독대를 부정적으로 볼 게 아니라 경제 회생을 위한 비즈니스 차원으로 봐야 한다. ‘뒷거래’를 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고 독대를 통해 기업활동의 어려움을 다독거려주면서 과감한 투자의 필요성을 독려하면 뜻밖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러나 그들의 건의는 “내가 왜 재벌 총수들과 독대까지 해가며 부탁을 해야 하느냐”는 노 대통령의 거절로 번번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한다. 최근에는 청년실업 해소를 위해 가을철 대기업 공채 규모를 늘려줄 것을 요청하는 독대 자리를 또다시 건의했으나 역시 비슷한 이유로 무산됐다고 정부의 한 고위 공직자는 전한다.

아마도 노 대통령은 전두환·노태우씨가 재임 중 재벌 총수들과의 독대를 통해 수천억원의 비자금을 수뢰한 추한 커넥션이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노 대통령의 ‘결벽증’ 때문에 경제 회생의 기회를 놓친다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랴’라는 격언을 노 대통령이 한번쯤 되새겨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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