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명인/ 주간
‘국보’- 1970년대 후반, 유신 시대에 대학을 다니다가 80년대 초반에 징역살이를 했던 우리 세대들은 국가보안법이라는 단번에 발음하기에는 조금 긴 법령의 이름을 이렇게 줄여 불렀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세대들이 지은 이름이 아니라 당시의 교도소에서 행정 편의상 간략하게 줄여 부르던 것이었다. 교도소 감방문 오른쪽 상단에는 흰색 페인트로 수감자들의 형명과 형기를 써놓은 폭 2cm, 길이 7~8cm쯤 되는 검은색 나무 패찰이 걸려 있는데, 이를테면 특수강도로 3년형을 선고받은 수감자는 ‘특강 三年 ○○○’,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으로 2년형을 받은 수감자는 ‘특가법 二年 ○○○’ 하는 식인데 같은 방식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수감자는 ‘국보 ○년 ○○○’ 이런 식의 패찰를 부여받는다. 당시 우리는 이 ‘국보’(國保)라는 약칭을 국가적 보물을 지칭하는 같은 음가의 ‘국보’(國寶)로 스스로 전용했던 것이다. 23년 전 반정부 투쟁을 벌였던 나 역시 집을 수색해서 나온 사회과학 서적 몇권을 빌미로 ‘국보’가 되었고 “그래 나는 국보다, 국보라는 이름이야말로 진짜 애국자, 진짜 나라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에게만 붙여지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나에게 들씌워진 이 터무니없는 형벌을 씁쓸한 위안거리로 삼았다.
국가보안법 폐지는 의식 · 문화 투쟁이다
그런데 국가보안법 개폐를 둘러싼 최근의 논란 속에서 나는 이 법이 20여년 전의 교도소에서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국보’(國寶)로 떠받들어지는 희극적인 모습을 보며 또다시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다. 이승만 정권 시절 도 반대하던 와중에서 ‘한시적으로’라는 단서를 붙이고 꼴사납게 만들어진 이 법 때문에 그동안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버리거나 평생 지울 수 없는 후유증에 시달리게 되고 이 땅의 민주주의가 그렇게 오래도록 제 걸음을 못 걷게 된 것만 해도 기막힌 노릇인데, 이 법을 없애잔다고 마치 하늘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엄살을 피우는 자들의 모습이라니….
그들, 국가보안법이 냉전 체제 아래서 시퍼런 서슬로 온 국민을 반편이로, 비겁자로, 밀고자로, 배신자로, 죄인으로 만드는 동안 역대 독재 정권 아래서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려온 그 자들에게 국가보안법은 하나의 형법이 아니라 사실상 헌법이었고 더 나아가 친미극우냉전부패독재공화국을 지켜온 불패의 수호 부적이었다.
그들도 이 법의 개별 조항들이 얼마나 낡고 우스꽝스러운지 모르지 않는다. 형법으로 대체 가능하다는 것을 법리적으로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그들의 국가로서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 낡은 사고임은, 고무찬양죄가 대부분 터무니없는 희극적 판결로 이어진다는 사실쯤은 그들도 잘 알고 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이다. 그 이름이 갖는 상징성이 사라지는 것을 그들은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 이름은 단지 하나의 법령명이라기엔 너무나 소중한 그들의 필생의 기호, ‘국보 1호’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차라리 의식투쟁이고 문화투쟁이다. 멀게는 문민정부 시절부터 가까이는 국민의 정부에서부터 점차 그 힘을 잃기 시작한 냉전적 수구세력으로서는 국가보안법을 잃는 것은 최고의 문화적 상징을 박탈당하는 일이고, 그것은 그들의 의식에 대한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이지만 한편으로 그들을 무의식 속의 오랜 편견과 증오와 배척의 가학증적 집착에서 해방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반대로 국가보안법의 철폐는 1987년 이후 지속적으로 전개돼온 정치적 민주화의 노정에 마침표를 찍는 일이며, 국민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마지막 공포의 그림자를 지워버리는 일이다. 양심 외에는 그 어느 것도 국민의 정치적 판단을 심판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크고 높게 세우는 일이다. 우리의 맑은 하늘을 덮어왔던 마지막 놋쇠 지붕을 걷어내는 일이다.
이젠 그 누구도 ‘국보’라는 패찰 아래 차가운 감옥 바닥에 내동댕이쳐져서는 안 된다. 더구나 그 끔찍함을 ‘나는 국보다’라는 피멍든 자조로 위안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누구도 ‘국보’의 이름 아래 다른 사람을 고문하고 생명을 빼앗고 그것으로 밥을 먹고 자식들을 키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젠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죄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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