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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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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04-08-13 00:00 수정 2020-05-03 04:23

▣ 배경록/ 한겨레21 편집장 peace@hani.co.kr

결혼 전에 선배들로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은 얘기가 생각난다. “부부싸움을 하면서 아무리 화가 치밀더라도 아내의 과거나 처갓집 내력 등에 대해서는 절대 입에 담지 말라.” 아내에게도 이 약속을 받아냈고, 살면서 가끔 부부싸움도 하지만 서로 약속을 잘 지킨 덕에 ‘칼로 물베기’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 선배들의 고마움을 잊지 않으며….

중국이 우리의 ‘과거’를 흠칫 들여다보는가 싶더니 아예 잘못됐으니 바로잡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사람끼리도 건드리기 조심스러운 게 과거사인데, 오랜 역사를 함께한 이웃 나라가 우리의 과거사를 강탈하려고 하니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틈만 나면 교과서 역사 왜곡을 일삼고 독도를 내놓으라는 일본 때문에 처음 당하는 일이 아니기는 하지만…. 중국은 1995년부터 학계를 중심으로 고구려 역사 왜곡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올 여름 무더위는 10년 만에 찾아왔지만 중국의 고구려 역사 빼앗기 작업은 10년째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작업’치고는 꽤나 치밀하면서 대담해 예상외로 ‘진도’가 빠르다는 느낌이 든다.

이번 중국 외교부의 홈페이지 삭제 파문을 지켜보면서 ‘마침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거칠게 표현하면 ‘먹고살 만해진’ 중국이 드디어 한국을 ‘우습게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그들 눈에 비친 한국의 모습은 분단의 상처조차 쉽게 치유하지 못하는 나라, 천민자본주의가 판치는 나라, 밤낮 없는 과거사 논쟁으로 미래가 어두운 나라, 교민이 납치돼도 파병을 재천명할 정도로 위기관리 능력이 없는 나라, 일부 언론과 정부가 끊임없이 대결하고 있는 나라 등등이 아닐까 싶다. 그러면서도 정작 반성할 줄 모르는 나라라는 점이 정말 ‘우습게’ 보였을 것이다. 그런 나라에게는 ‘고구려 삭제’ 항의에 ‘고대사 몽땅 삭제’로 대응해도 뒤탈이 없을 것이라는 기고만장함도 깔려 있는 듯하다.

이번 사태를 보는 또 다른 시각도 있다. 중국이 남북한의 화해 분위기를 감안해 머지않아 통일이 이뤄질 것임을 예감하고 있고, 통일 이후 한반도에서 미국의 북진을 견제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분석이 그것이다. 정치·외교적으로 볼 때 타당성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고구려 역사 빼앗기 작업을 남북통일의 징후로까지 확대해석해 흐뭇해할 일은 결코 아닌 듯싶다. 기우일지 모르지만, 남북통일 과정에서 중국이 북한 땅 일부를 내놓으라고 우리를 협박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한·중·일 3국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연구할 것”을 지시하고, 정부 당국자들 사이에 “역사 문제는 단기적 대응보다는 장기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하고, 정치적·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학술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안이한 시각이 자리잡고 있는 데 대해 우려를 표시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은 중국에게 ‘우습게 보인’ 점들에 대한 뼈아픈 반성이 필요하다. 정부는 물론이고 학계 등 민간도 나서 적절한 대응책을 찾아야 하고 북한과의 공조도 필수적이다. 고구려 역사를 중국에 빼앗기고 나면 대한민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뿌리는 어디에서 찾을 것이며, 통일 조국은 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섬뜩함 때문에 ‘힘을 기르소서’라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가르침이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만주 벌판으로부터 불기 시작한 이 세찬 ‘바람’은 더위를 순식간에 날려버릴 정도로 우리를 전율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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