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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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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다리

등록 2004-07-31 00:00 수정 2020-05-03 04:23

▣ 배경록/ 한겨레21 편집장 peace@hani.co.kr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386세대 비판’ 발언으로 도마에 올랐다. 이 부총리가 자신의 사임설을 확인하기 위해 밤늦게 자택을 찾아온 몇몇 기자들에게 경제정책과 정치 및 언론 등에 대한 소회를 밝힌 것이 화근이었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이미 한잔 걸쳤고 기자들을 집 안으로 들여 함께 맥주를 마시는 자리에서였다. 대화록 전문을 읽어보면 진의가 애매해 일부 오해할 수 있는 대목도 눈에 띄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경제부총리로서 나름대로 소신을 밝힌 것으로도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언론들은 ‘노무현 대통령의 386 참모들과 열린우리당이 경제 살리기의 걸림돌’이라는 소신 발언을 한 인물로 그를 치켜세우는 데 혈안이 됐다. 때를 놓칠세라 보수 기득권 세력들은 “요즘 진짜 시장경제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그런 식으로 뒷다리를 잡으면 시장경제가 되겠는가”라는 그의 말에 통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부총리를 띄워 노 대통령과 정면 대결을 하도록 부추기면서 개혁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음이 엿보인다. 며칠 뒤 그가 “뜻이 잘못 전달됐다”고 조목조목 해명하자, 보수언론과 기득권 세력들은 태도를 돌변해 “당신은 비겁쟁이”라고 몰아세운다. 개혁을 거부하는 속내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또다시 ‘친일 독재자의 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자 발끈하고 있다. ‘연좌제가 아니냐’는 항변에는 일면 수긍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연좌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 행적에는 해당될지 몰라도 37년 동안의 독재 행적과는 무관해 보인다. 그녀의 아버지로 인한 폐해가 고스란히 ‘오늘’에 녹아 있고 우리들의 삶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이 ‘한강의 기적’을 앞세우며 유신정치를 통해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장기 집권을 꾀했던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경제 살리기를 외치며 개혁을 후퇴시키려는 지금의 보수진영 의도와 수법이 그 시절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국민들 사이에 “먹고사는 문제만 해결되면 만사형통인가” “배고픈 민주주의도 소중하지 않은가”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할 무렵, 박 전 대통령은 사라졌다. ‘박정희 치적’을 흉내내며 권력을 유지한 전두환·노태우 정권, 어정쩡한 민주화와 세계화로 IMF 구제금융을 초래한 김영삼 정권, IMF 뒤치다꺼리에 여념이 없던 김대중 정권에 이르기까지 늘 국가적 지상과제는 경제 살리기였다. 노무현 정권도 예외는 아니어서 개혁의 ‘뒷다리’를 잡는 세력과 곳곳에서 충돌하고 있다.

한국정치연구회는 IMF 직후인 1998년 김대중 정권에게 그런 세력들을 경계할 것을 주문했다. “박정희 향수는 일상화되어 대중의 합리적인 이성을 마비시키고 은연중에 파시스트 지배의 망령을 부르는 주술(呪術)로 작용하고 있으며, 보수세력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재생산하기 위해 이 망령을 부적(符籍)으로 사용하고 있다.“( 중에서)

‘이헌재 파문’의 뿌리에는 ‘박정희 향수’가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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