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두 인질/ 김명인

등록 2004-07-22 00:00 수정 2020-05-03 04:23

▣ 김명인/ 편집인

총면적 9만9천㎢, 인구 4805만3500명(2003년), 1인당 국민소득 8910달러(2000년), 1905년부터 1945년까지 40년간 일본 식민지, 1945년부터 현재까지 미군 주둔, 1948년부터 현재까지 남북 분단, 1950년부터 1953년까지 3년간 남북전쟁, 1961년부터 1992년까지 31년간 군부독재, 1990년, 1992년 소련, 중국과 국교 수립, 2000년 남북 정상회담.

1만달러의 대한민국과 1천달러의 필리핀

총면적 30만㎢, 인구 8452만5639명(2002년), 1인당 국민소득 1040달러(2000년), 1565년부터 1898년까지 333년간 스페인 식민지, 다시 1902년부터 1935년까지 33년간 미국 식민지,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이 점령, 1965년부터 1986년까지 22년간 마르코스 일인독재, 1975년 중국, 소련과 국교 수립, 1992년 미군 철수 및 수빅만 해군기지 폐쇄, 같은 해 필리핀공산당 합법화.

한국인인 당신에게 묻겠다.

대한민국을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한 아시아의 신흥공업국, 정보기술(IT) 산업과 반도체와 자동차의 나라, 88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을 개최한 나라, 4·19와 광주민중항쟁과 6월항쟁의 나라…. 이런 것들이 떠오르는가?

그러면 필리핀을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서태평양의 열대 섬나라, 아시아의 후진빈국, 미국의 식민지, 독재와 부정부패에 신음해온 나라, 게릴라가 출몰하는 나라, 한국에 노동자를 수출하는 나라, 한국에서 받는 월급 1년치를 모아서 가면 10년간 대저택에 가정부 두고 호화생활 할 수 있는 나라…. 이런 것들이 떠오르는가?

당신은 필리핀보다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이 더 다행인가? 더 자랑스러운가? 미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니고 중국도 아니고 싱가포르도 아닌 필리핀과 비교한다면 누구든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사는 것이 더 낫고 다행스럽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인종도 언어도 문화도 다른 ‘머나먼 남국’ 필리핀과, 나의 태를 묻었고 장차 뼈 또한 묻을 ‘나의 조국’ 대한민국을 이처럼 뜬금없이 같은 자리에 놓고 비교하면서 나는 당신들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필리핀 정부는 지난주 이라크 무장단체가 취업차 이라크에 나가 있던 안젤라 델라 크루즈라는 이름의 자국 트럭운전사를 납치하여 이라크에 파견되어 있는 필리핀군의 철수를 요구하자 즉각 자국 파견군의 조기 철군을 결정했고 그 필리핀인을 납치한 무장단체는 그의 석방을 약속했다. 한국 정부는 지난달 이라크 무장단체가 이라크에 나가 있던 미군 군납업체 직원 김선일씨를 납치하여 한국군의 철수와 추가 파병 철회를 요구하자 곧바로 파병 강행을 천명했고 김선일씨는 끝내 무참하게 살해되었다.

여러 가지 고려해야 할 복잡한 조건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나도 그 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국 ‘후진국’ 필리핀 정부는 자기 나라의 국민 한 사람의 생명을 구했고, 자칭 ‘선진국’ 대한민국 정부는 자기 나라의 국민 한 사람의 생명을 버렸다. 강대국 미국의 눈치를 봐야 한다거나 그들의 지원을 얻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국민소득 1천달러짜리 필리핀이 국민소득 1만달러짜리 한국에 비해 결코 절박성에서 뒤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필리핀 정부는 거두절미하고 우선 사람의 목숨부터 구해냈고, 대등한 자주외교, 국익외교를 입만 열면 떠벌리던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과의 약속을 위해 국민과의 약속을 저버렸다.

야만의 실리주의 앞에서 절망한다

어떤 나라가 제대로 되어먹은 나라인가. 어떤 나라가 살 만한 나라인가. 어떤 나라가 자랑스러운 나라인가.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이 뒤집혀진 가치관과 피도 눈물도 없는 야만의 실리주의 앞에서 백번 천번 절망한다. 나는 내가 필리핀이 아니고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는 사실이 너무나 고통스럽다. 내가 대한민국의 국민이 아니고 차라리 마닐라 빈민가 쓰레기 휘날리는 뒷골목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였다면 훨씬 더 행복했을 것이다.

서기 2004년 여름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고 있어야 한다는 이 숙명 앞에서 나는 전율한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