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록/ 한겨레21 편집장 peace@hani.co.kr
젊은이들 사이에 자주 쓰이다 이제는 남녀노소가 모두 즐겨 사용하는 말이 있다. “필 꽂혔다” “필 받았다”라는 국적 없는 말이 그것인데, 묘한 것은 한번 들으면 그 어감처럼 오래 기억에 남는다는 것이다. 영한사전을 들춰보면 ‘필’(feel)은 명사로는 ‘감촉, 느낌, 직감’으로, 동사로는 ‘(마음으로) 느끼다, 생각하다. (물건이) ~한 느낌이 들다’로 풀이돼 있다. 사람이면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 또는 어떤 주제에 대해 가질 수 있고 갖고 있는 것이 ‘필’인 셈이다.
며칠 전,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에게 꽂혀 있는 ‘필’을 한 가지 얘기하는 바람에 나라 안이 시끌벅적해졌다.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 “저는 이것(행정수도 이전 반대론)을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 운동, 퇴진 운동으로 느끼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전부 힘으로 하려고 하니 이러다 대통령을 못해먹겠다는 위기감이 든다”고 말할 정도로 평소 노 대통령은 거침없이 속내를 드러내왔다. 특히 이번에는 정책에 대한 자신의 ‘필’을 밝힌 것인데도 왜 온 나라가 시끄러워졌을까? 이어진 노 대통령의 말 때문이다. “행정수도 반대 여론을 주도하는 기관을 보면 서울 한복판인 정부청사 앞에 거대 빌딩을 가진 신문사 아니냐”며 와 를 겨냥한 것이 화근이었다. 물 만난 고기처럼 이들 신문은 ‘행정수도 이전 반대는 대통령 퇴진 운동’이라는 제목을 달아 대통령과 국민을, 수도권과 지방을 갈라놓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노 대통령의 ‘필’을 단정적인 어투로 가공하면서 ‘감히 우리를 건드려’라는 식의 오만함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오만은 결국 청와대 참모들과의 공방으로, 헌법소원으로 이어지며 언제 끝날지 모를 이 지루한 논쟁에 기름을 붓고 있다. 바람 한점 없는 여름밤처럼 짜증나는 일이다.
그런 가운데 통쾌한 소식은 미국에서 전해졌다. 미국 상원 정보위원회가 “미국은 잘못되고 과장된 정보를 근거로 이라크를 침공했다”고 발표함으로써 마침내 이라크전이 명분 없는 약탈 전쟁임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그로 인해 부시 미국 대통령도 ‘필’ 때문에 수모를 겪게 됐다. 한국과 미국의 대통령이 ‘필’ 때문에 동시에 곤경에 처한 것은 이채롭다. 정보위 발표를 들은 부시 대통령은 “(전쟁을 시작하기 전) 사담 후세인은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위험인물이었고 그가 알카에다와 연계돼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항변했다고 외신은 전하고 있다.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9·11 응징의 ‘필’이 그에게 꽂혔고, 결국 전쟁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쓰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후세인이 권좌에서 물러나 세상은 더 나아지지 않았느냐”고 큰소리를 치고 있다니 그 오만함이 조선·동아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한-미 동맹을 앞세우며 한목소리로 파병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전쟁을 부른 부시 대통령의 ‘필’은 피비린내 나는 대가를 치르고 있지만, 행정수도를 이전해야 한다는 노 대통령의 ‘필’은 적어도 피를 부를 일은 아니니 차분하게 지켜봐도 될 일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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