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사고 1년 뒤, KAIST 실험실을 가다… 안전을 위한 제도적 정비 · 예산 지원 여전히 부족
▣ 대전= 글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5월13일 대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선 두 건의 추도식이 열렸다. 학교쪽이 공식적으로 준비한 ‘고 조정훈 학우 1주기 추모식’과 학생들이 마련한 ‘풍동실험실 사고 1주기 추모제’였다. 같은 사고를 놓고 벌어진 행사이지만 차이가 있었다. 학교의 초점이 ‘희생자’인 데 반해 학생들은 ‘사고’를 주목했다.
폭발의 상처는 깊었다
학교가 이미 세상에 ‘없는’ 이의 넋을 기렸다면, 학생들은 아직도 현실에 ‘있는’ 위험을 기억했다. 학생들에겐 아직도 ‘사고’가 계속되고 있었다.
추모제 1주일 뒤인 5월20일, 폭발사고가 일어났던 항공우주공학과 풍동실험실을 찾았다. 참혹했던 기억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다. 파손된 건물은 수리를 마쳤고 실험실은 깨끗하게 정리돼 있었다. 목숨을 잃은 조정훈씨와 함께 사고를 당해 두 다리를 잃은 강지훈(29)씨는 “실험에 쓸 질소통을 구하려고 실험실 통로를 막고 있던 가스통을 들었다가 폭발이 일어났다”고 증언했다. 사고가 일어나기 전엔 실험실 안에 가스통을 쌓아두는 것이 예사였던 탓에 약간의 스파크만 일어도 폭발 위험이 있는 혼합가스조차 다른 가스통들과 뒤섞여 있었던 것이다. 사고 뒤 문제가 됐던 가스통들은 건물 밖 고압가스캐비닛에 놓였고, 실험실 안에 놓인 가스통도 쇠사슬로 묶여졌다. 겉으로 보기엔 말끔한 실험실이지만 연구원들에게 새겨진 상처는 깊어 보였다. 실험실 설비에 대해 물으려고 하자 한 학생이 취재진에게 다가와 “아무것도 답해줄 수 없다”며 나갈 것을 요구했다. 그동안 언론에 많이 시달린 탓인지 나름대로 기자들에게 냉담하게 대처하는 요령을 익힌 듯했다.
현재 이 사건은 법적으로도 끝나지 않았다. 업무상 과실치상 혐의로 지도교수를 비롯해 실험실 내 박사후연구원(Post-Doctor) 1명과 학교 안전팀 직원 2명, 가스업체 직원 등 모두 5명이 피고자 신분에 놓인 채 재판이 진행 중이다. 피해자인 강지훈씨는 1년 남짓 지루한 입원 생활을 마치고 22일 병원에서 퇴원해 학교로 돌아왔으나 아직 보상금 액수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다. 풍동실험실 옆에는 조정훈씨 아버지인 조동길 교수(공주대 국어교육과)가 세운 추모비가 애잔함을 더했다.
안전관리 요원 절대 부족
풍동실험실을 나와 자연과학동의 한 실험실에 들렀다. 각종 시약이 책상 위 선반에 빼곡히 얹혀 있었다. 화학약품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솔벤트류의 약품인데 별다른 해는 없어요.” 실험실을 안내해주던 연구원은 “본래 실험실에 소화기가 5대 있었는데 얼마 전 다른 실험실에서 화재가 일어나 빌려줬다”고 예사롭게 말했다. “크고 작은 사건이야 늘 있는 거지요.” 그는 무엇보다 수소반응기가 실험실 안에 놓여 있고, 약품창고가 따로 없어 선반 위까지 약품이 들어차 있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외국 실험실에 가보니 수소반응기는 야외에 따로 방을 만들어 사방에 안전벽을 둘러쳐놓았더라고요. 우리는 이처럼 실험실 입구에 놓고 별다른 경고 표시도 없이 사용하고 있지요.”
그는 되레 나이가 많은 박사급 연구원들이 안전사고에 대처하는 요령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각 실험실 학생들이 맡도록 돼 있는 ‘안전담당자’는 서류 처리, 검수영수증 챙기기 등 자질구레한 일들이 많아 주로 연차가 낮은 연구원들이 담당한다고 했다. 안전담당자가 학교에서 주관하는 안전교육을 받고 온다고 해도 책자를 나눠주는 정도이지 실질적으로 실험실 학생들에게 안전교육을 하기는 무리라고 했다.
그다음은 응용공학동의 공동실험실. 층고가 3층 정도 되는 커다란 실험실엔 선반, 굴삭기 등 공작기계가 가득했다. 응용공학동에서 장비 유지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직원(테크니션이라고 부른다) 홍석구씨는 “안전관리 요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과학기술원은 2000년 응용공학동의 실험실에서 진공펌프 가열로 재산피해 5천여만원 상당의 화재가 발생한 이후 안전체계를 새로 짰다. ‘안전팀’이란 별도 부서를 신설했으며, 학과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3~5명의 교수와 테크니션이 참여하는 학과안전위원회와 그보다 더 상위 기구인 총괄안전위원회를 만들었다. 교수회의와 겸한 학과안전위원회 회의는 형식적인 업무 보고에 그치기 일쑤다. 안전팀에는 9명의 직원이 있는데, 이 중 보안담당·카드키·예비군민방위 담당자와 팀장을 빼면 가스·화공 등 안전분야의 직원은 4~5명밖에 되지 않는다. 이 인력만으로 300여곳이 넘는 실험실의 안전을 전적으로 책임지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엔 홍석구씨처럼 학과마다 소속된 테크니션들이 실험실을 순찰하며 문제점을 지적하는 정도인 것이다.
예산도 법령 제정도 도루묵
홍씨는 “응용공학동만 해도 교수별로 27개 실험실이 있다. 100억원이 넘는 자산을 관리하며 장비를 보수하는 것이 테크니션의 주업무다. 여기에 안전담당까지 모두 책임지기는 무리”라며 학교가 연차적으로 예산을 확보해 기본적인 안전시설을 갖춰가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은 몇몇 유독가스 빼고는 대부분 가스통을 실험실 안에 두고 쓰고 있지요. 모든 가스통을 건물 밖에 둘 수 있도록 배관을 연결하고 가스나 연료라인을 설치할 때 중간밸브를 여러 개 둬야 합니다.” 14년 전 카이스트가 대전으로 옮겨오면서 지어진 건물들이 애초부터 실험실 용도로 설계돼 있지 않아 대피시설 같은 물리적 환경을 갖추지 않은 것도 지적했다.
한국과학기술원은 지난해 감시·방화·안전장비를 교체하는 내용의 ‘세이프 캠퍼스’ 계획안을 과학기술부에 요청했다. 공교롭게도 폭발사건이 있던 2003년 5월13일 ‘세이프 캠퍼스’ 예산설명회가 열렸다. 그러나 3개년에 걸쳐 80억여원이 드는 이 계획안은 예산을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폭발사고를 계기로 한동안 부산했던 실험실 안전관리 법령 제정 움직임도 부처간 갈등으로 잦아든 지 오래다.
한국과학기술원 학생회 산하 ‘안전쟁취특별위원회’ 활동을 하고 있는 한희석(27·전자과)씨는 “서울대 폭발사고(1999년)와 풍동실험실 사고는 이공계 명문대학에서 벌어진 대형 사고였기 때문에 관심을 모은 것이다. 그동안 어떤 사고가 있었는지 사례조차 제대로 수집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실험실의 위험은 카이스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제는 전국 대학 실험실의 안전을 위해 서로 힘을 뭉쳐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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