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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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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증인, 그들은 누구인가

등록 2004-06-02 00:00 수정 2020-05-03 04:23

병역은 물론 국기경례와 수혈까지 거부하며 이단시되는 우리 안의 이방인


투옥당하고, 퇴학당하고, 왕따당해온 우리 안의 이방인, 여호와의 증인.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계기로 뉴스의 중심에 떠오른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왜 병역은 물론 수혈과 국기경례까지 거부하는가. 과연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글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여호와의 증인은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사람을 ‘이방인’으로 부른다. 하지만 정작 현실에서 이방인은 그들인지도 모른다. 지난 반세기 동안 여호와의 증인은 한국 사회의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아니 ‘왕따’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그들은 종교적 교리에 따라 현실의 율법을 거부했다. 병역거부자, 국기배례거부자, 투표거부자, 수혈거부자…. 그들의 거부는 현실의 율법과 곳곳에서 충돌했다. 학교에서, 군대에서, 동네에서, 직장에서. 그들은 투옥당했고, 퇴학당했고, 왕따당했다.

상당수 국민들의 ‘안 좋은’ 기억들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안 좋은’ 추억도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여호와의 증인은 기차역에서의 고즈넉한 기다림을 방해하고, 휴일 집에서의 달콤한 휴식을 방해하는 사람들이었다. ‘왕국회관’이라는 낯선 간판과 ‘파수대’라는 독특한 책자는 그들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을 더욱 자극했다. 더구나 기독교의 이단이라는 규정은 왕따의 알리바이가 되기에 충분했다. 여호와의 증인에 관한 ‘안 좋은’ 추억을 품고 ‘왕국회관’이라는 금단의 땅에 들어섰다.

5월30일 오전 9시40분께, 서울 강서구 염창동 왕국회관에는 6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배단위를 ‘회중’이라고 부른다. 이날 모인 사람들은 가양중앙 회중. 지난 5월21일 서울남부지법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정병무(24)씨도 가양중앙 회중 소속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일상을 알기 위해 정씨의 하루 일과를 쫓아가보기로 했다. 9시50분께 정씨가 도착했고, 10시 정각에 집회가 시작됐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배라는 말 대신 집회라는 표현을 쓴다.

이날 집회는 공개강연과 파수대연구로 진행됐다. 먼저 서울 노고산 회중의 장로인 김형식씨가 ‘사랑은 참그리스도인 회중을 식별케 한다’는 주제로 공개강연을 했다. 강연은 여러 성경 구절을 인용해 사랑의 의미에 대해 설교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이처럼 여호와의 증인에는 목사가 따로 없다. 대신 장로들이 돌아가면서 강연을 한다. ‘왕국회관’에는 십자가도 없다. 정병무씨는 “성경에는 목사 직분을 두라는 말씀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말씀도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공개강연이 끝나자 워치타워협회에서 발간하는 파수대를 읽고 토론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교회와는 다른 형식의 예배이지만, 흔히 상상하듯이 광신적인 울부짖음은 없었다. 다만 다른 교회처럼 늦게 들어오는 사람, 빨리 나가는 사람, 이따금 조는 사람은 있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대개 화요일, 목요일, 일요일, 일주일에 세 차례 집회를 연다.

정오께 집회가 끝나고 정씨를 비롯한 여호와의 증인들과 점심식사를 함께했다. 식당에 둘러앉은 10여명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아픈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올해 서른살인 한 여호와의 증인은 교련 수업을 받을 수 없어 고등학교 입학을 포기했다고 한다. 1991년 그가 다닌 검정고시학원 4월 개강반의 수강생 60명 중 30명이 여호와의 증인이었다고 한다. 그는 “3월에 학교에서 잘리는 증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의 지인 중에는 교련 수업 시간에 붕대 감기를 거부했다고 강제 자퇴당한 여학생도 있다. 심지어 1990년대 초반 한 실업계 고교에서는 9명의 여호와의 증인이 무더기로 퇴학당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던 나이가 지긋한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런데도 옛날에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일부러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는 편견까지 있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퇴학 사태는 1990년대 중반 교련 수업이 폐지돼서야 사라졌다.

곤욕을 치르는 전도활동

국기에 대한 경례도 학교생활의 걸림돌이었다. 유신 시절,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한 여고생이 제적된 사건이 있었다. 김해여고에 다니던 한 여호와의 증인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해 제적당했다. 여고생은 징계처분 취소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1976년 당시 대법원은 “종교의 자유 역시 학교의 학칙과 교내질서를 해치지 아니하는 범위 내에서 보장되는 것”이라고 판시했다. 이런 일은 1970년대에 끝난 것이 아니다. 지난해에도 경기 의정부의 한 고등학교가 국민의례를 거부하겠다고 밝힌 응시생을 불합격 처분한 일이 있었다. 학생의 부모가 교육청에 진정서를 냈지만, 경기도 교육청은 학교쪽의 조치가 정당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들의 병역거부, 국기배례거부 등에 대한 기독교의 비판도 날카롭다. 탁지원 현대종교 소장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따르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성경을 현대적 상황에 맞게 적용해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의 대법원은 1943년 동일한 행위에 대해 “국기경례를 강요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식사가 끝나자 정병무씨가 전도활동에 나섰다. 그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주 일요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강서구 가양동 일대의 아파트를 돌며 전도를 한다. 평일에도 틈날 때마다 전도활동을 한다. 정씨는 열심히 초인종을 누르고 대화를 시도했지만 성공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예 문을 열지 않거나 대화를 거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는 “갈수록 전도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이 사실”이라며 “더러는 심한 말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그가 손에 든 볼펜을 빼앗으면서 “다음에 오면 주겠다”고 하는 등 곤욕을 치른 경우도 적지 않다. 그는 전도활동을 마친 뒤에도 대개 여호와의 증인인 선후배들과 어울리며 일요일을 보낸다.

정씨는 여호와의 증인 2세다. 여호와의 증인인 부모 슬하에서 자랐고,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침례를 받았다. 그에게 병역거부를 하면서 망설이지 않았냐고 물었다. “침례를 받으면서 이미 결심한 일”이라고 짧게 답했다. 그는 한달에 70시간 이상의 종교활동을 하는 ‘파이오니아’이다. 주로 건축 봉사활동을 한다. 병역거부 무죄 판결 전까지, 2003년 8월부터 10개월 동안 경기도 오포의 왕국회관 건설현장에서 매주 6일씩 일해왔다. 날마다 오전 8시부터 6시까지 작업이 이어진다. 물론 무보수로 하는 일이다. 돈벌이를 하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에 “물론 가계를 도와야 하는 부담도 있지만 지금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만족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젊은 여호와의 증인인 정씨를 만나기 전날, 연배가 있는 여호와의 증인인 신승구(50)씨의 사연을 들었다. 의사인 신씨의 삶 속에도 여호와의 증인이 겪어온 험한 세월이 녹아 있다. 강원도 영월 출신인 신씨는 중학교 때 서울로 유학을 왔다. 신씨는 외할머니의 영향으로 고등학교 때 여호와의 증인이 됐다. 7남매의 장남으로 집안의 희망이던 신씨가 여호와의 증인이 되자 영월의 집은 발칵 뒤집혔다. 그 뒤 전문의 과정까지 마친 신씨가 병역거부를 하려 하자 집안의 반대는 극에 달했다. 하지만 신씨의 고집을 꺽을 수는 없었다. 결국 아들이 병역거부를 하자 아버지는 아들의 호적까지 서울로 옮겨버렸다. 지방 유지이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호적에 ‘빨간 줄’이 가는 것이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성경이 약속한 낙원을 믿는다”

신씨는 병역거부로 의사면허까지 취소당했다. 그가 1985년 병역거부로 실형을 선고받자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이 의사면허 취소 처분을 내린 것이다. 출감 뒤 사유서를 제출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1년여 뒤에 의사자격증을 재교부받기는 했지만, 당시 아이 둘이 딸린 가장이던 신씨는 생계를 위해 영어테이프 판매일을 해야만 했다. 그전에도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겪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의대를 졸업한 뒤 기초의학을 전공하려 했지만 생리학 교실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그는 “병역 문제가 생기면 골치 아플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인턴 시절에도 ‘베스트 인턴’상을 받을 만큼 인정을 받았지만, 그가 가기를 원했던 소아과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그는 ‘비인기’ 전공이던 방사선과를 택했다. 그에게 종교적 신념 때문에 직업적 성공을 놓친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권력과 재물을 갖고 70~80년을 사는 것보다 성경이 약속한 낙원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훨씬 좋은 것 아니냐”라고 되물었다. 이처럼 여호와의 증인들은 성경이 약속하는 낙원을 믿으며 현실의 억압과 폭력을 묵묵히 수긍하며 살아왔다. 심지어 그들은 “원시 기독교의 본모습을 따르는 참그리스도인은 어느 정도 현실과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의사인 신씨는 여호와의 증인 병원교섭위원회 위원도 맡고 있다. 병원을 찾아다니며 여호와의 증인들을 위한 무수혈 수술을 하도록 의사들의 협조를 구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수혈거부는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찍힌 낙인 중 하나다. 특히 어린 자녀의 수혈거부는 민감한 윤리 문제다. 그에게 응급한 수술히 필요한 어린 자녀에게조차 수혈을 거부하는 것은 가혹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녀를 양육하도록 하느님께 위탁받은 부모로서 자녀를 신체적으로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며 “우리는 의사들이 하느님의 관점에 적합하게 치료해주기를 부탁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여호와의 증인들도 다른 부모들처럼 자녀에 대해서 정당한 친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또 “한국에서 최근 수혈을 하지 않아 사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수혈은 치료의 한 방법일 뿐 모든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무수혈 수술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인제대 백병원, 순천향대학병원 등 무수혈 수술을 실시하는 병원의 안내책자도 보여주었다. 수혈거부에 대해 여호와의 증인들은 한결같이 “우리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당연히 병원에서 치료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인데, 마치 치료마저 거부하는 것처럼 왜곡된 인식이 퍼져 있다”고 주장했다.

무수혈 수술에 대한 엇갈리는 관점

하지만 무수혈 수술에 대한 관점이 엇갈리기도 한다. 염욱 순천향대학병원 무수혈센터장은 “무수혈로 모든 수술을 할 수 있다”면서도 “수술의 종류에 따라 위험이 높아지는 것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위험이 높아지는 대표적인 수술로 유아의 혈관수술, 동맥수술 등을 꼽았다. 아직 무수혈 수술이 충분한 안전성을 보장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대법원 판례는 수혈거부에 대해 부정적이다. 1980년 대법원은 장출혈 증세가 심한 11살 딸에 대한 수혈 치료를 거부한 어머니에 대해 유기치사죄를 선고한 바 있다. 당시 대법원은 “아무리 생모라 하더라도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내세워 환자에 대해 의사가 권하는 최선의 치료방법인 수혈을 거부, 환자를 숨지게 할 권리는 없다”며 어머니에게 징역 1년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지금껏 여호와의 증인은 사법적 단죄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국가주의 시각으로 보면 ‘비국민’이었고, 기독교 관점에서는 ‘이단’이었다. 하지만 서울지법의 무죄 판결 이후, 그들을 보는 시선은 헌법상 권리를 가진 시민으로 바뀌고 있다. 우리 안의 오래된 ‘이방인’인 여호와의 증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과연 한국 사회의 성숙을 드러내는 하나의 지표가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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