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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철] 전우여 이제는 잘 자라

등록 2004-04-22 00:00 수정 2020-05-03 04:23

경북 군위군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발굴 현장… 지옥같은 낙동강 전선을 증언하는 유골들

54년 동안 흙 속에 묻혀 있던 한국전쟁 전사자들의 유해를 기자가 직접 찾아나섰다. 막연한 제보를 단서로 산을 뒤지는 발굴단의 노고. 우리는 언제까지 그들을 흙 속에 방치해야 할까.

군위= 글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orgio.net

“아! 거기는 손대지 마십시오.”

진작부터 내 서툰 삽질을 걱정스레 지켜보던 한 병사가 다급하게 외쳤다.

나는 속으로 ‘아니 나무뿌리 가지고 왜 저러나’ 하고 의아했지만, 일단 삽에서 손을 뗐다. 내가 손에 쥔 발굴용 삽은 꽃모종을 옮기는 삽만큼이나 작은데다, 내 딴에는 무척 조심스럽게 조금씩 땅을 파고 있었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나무뿌리인지, 유골인지…

내 앞에 있던 상병 계급장을 단 병사는 ‘다’와 ‘까’로 끝나는 군대 말투로 대답했다. “그게 말입니다. 유해를 잘못 건드리면 훼손될 수도 있습니다.”

한참 어린 병사한테 ‘지적사항’을 듣고 다시 봐도 내 앞의 땅속에 박혀 있는 희뿌연 물체는 나무뿌리였다. “내가 보기엔 그냥 나무뿌리 같은데….”

“하지만 잘 보시면 다릅니다. 일단 색깔이 나무뿌리와 다르고, 사람 뼈에는 가는 골이나 조직이 있습니다. 이건 발목뼈 같습니다.”

사람 뼈와 나무뿌리 식별요령을 듣고 나서 유심히 살펴봤다. 하지만 내 눈으로는 도저히 뼈와 뿌리를 구별할 수 없었다. “나는 정말 잘 모르겠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구별합니까?”

“저희는 대학에서 관련 전공을 했고 군에서 집체 교육도 받았습니다.”

돕자고 나섰다가 방해만 한 게 아닌가 싶은 겸연쩍은 마음에 앞에 있는 흙 묻은 손거울을 만지작거렸다.

“그 자리에 두십시오. 유품은 원래 있던 자리에서 옮기면 안 됩니다.”

다시 ‘지적사항’이 쏟아졌다. 순간 훈련소 마치고 자대 배치된 신병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한 장소에서 유해와 유품이 뒤엉킨 채 한꺼번에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사소한 유품이라도 신원 확인의 실마리가 되기 때문에 처음 발굴 장소를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 만약 내가 손거울을 처음 발견된 장소에서 옮겼다면, 유해 신원 확인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 그 병사의 지적은 지극히 타당했다.)

이쯤이면 눈치 빠른 독자는 알아차렸겠지만, 이번주 ‘기자가 뛰어든 세상’은 ‘6·25 전쟁 전사자 유해발굴 사업’이다. 털어놓자면, 이 취재는 상당 부분 영화 인기에 편승한 것이다. 이 영화를 열고 닫는 장면이 전사자 유해발굴 장면이다. 영화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진태(장동건)의 유골과 진석(원빈)의 이름을 새긴 만년필이 발견되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하지만 이번 취재에는 단순히 영화의 인기와 독자의 호기심에 영합한 것뿐만 아니라, 평소 품고 있던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는가’란 문제의식도 작용했다.

육군본부에 문의한 결과 올해 9곳에서 유해발굴 작업이 잡혀 있었다. 마침 경북 군위에서 4월6일부터 24일까지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4월15일 오후 제17대 총선거 투표를 마치고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갔다.

“피난갔다 돌아와보니 주검이 나뒹굴어”

4월16일 오후 경북 군위군 의흥면 한 야산. 농사 준비에 바쁜 농부가 경운기를 몰고 가고, 저수지 곁에는 봄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도로변에 취재차량을 세워놓고 군용 지프를 타고 산길을 2분가량 올라갔다.

‘여기에 군인들이 묻혀 있다’고 제보한 허두(80·경북 군위군 의흥면 매성동) 할아버지가 발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50년 9월 피난갔다 돌아와보니 동네가 불탔고 논과 밭에는 박격포탄 껍질과 탄피 등이 널려 있었다. 동네 사람들과 마을 여기저기에 있던 군인 주검들을 이곳에 묻었다”고 말했다. 그는 “내 기억에는 6~7구가량 묻었던 것 같다. (유해가) 많이 나온다. 나오기 시작하면 많이 나온다”고 말했다. 50대 동네 주민은 “어릴 때 어른들은 개구리가 시끄럽게 울면 난리 때 죽은 사람들의 원혼이 우는 것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경북 군위군 지역은 다부동이나 안강·기계처럼 많이 알려진 곳은 아니지만 낙동강 방어선의 격전지다. 한국전쟁 때 5번 도로를 따라 의성으로부터 대구에 이르는 군위 지역 도로와 고지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1950년 7월29일 워커 미8군 사령관은 유엔군 전 장병들에게 ‘사수냐 죽음이냐’(stand or die) 선택을 요구하며 현 전선 사수 명령을 내렸다. 당시 백선엽 국군 1사단장은 고지마다 주검이 쌓이고 시체를 방패 삼아 또 싸우는 낙동강 방어선 모습을 두고 “나는 지옥의 모습이 어떠한지는 모르나 이보다 더할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의 처참한 낙동강 방어선 전투 장면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경북 군위 지역은 주검이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루던 낙동강 방어선의 한 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 조용하고 평범했다. 이런 동네 뒷산에 54년 동안 유해가 묻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발굴 현장에서는 접근 금지 줄을 둘러치고 장병 30여병이 유해발굴 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나를 위해 유해발굴단에서는 등에 ‘유해발굴단’이라는 글씨가 찍힌 A급(군대 속어로 최상품질) 조끼를 준비해줬다. 나는 검은색 유해발굴단 조끼를 차려입고 온갖 발굴장비를 조끼 앞주머니에 달고 있었지만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사실 유해발굴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전문 지식과 경험이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이 덜컹 손을 댔다가는 유해발굴은커녕 ‘발파’하기 십상이다.

발굴단은 제보와 지형 답사, 전사 분석 등을 토대로 발굴 장소를 정한다. 지뢰탐지기로 폭발물이 묻혀 있는지를 확인하고 발굴 지역을 구획정리한다. 땅을 팔 때는 유해 파손을 막기 위해 포클레인 같은 중장비를 쓸 수 없고 조심스럽게 공병삽이나 야전삽으로 파야 한다. 이 작업까지는 유해발굴단뿐만 아니라 해당 지역 부대병력들도 거든다.

돌 하나도 확인 또 확인

하지만 유해가 발견되면 육군 유해발굴반원이 나선다. 병사 16명, 간부 2명으로 구성된 유해발굴반은 나름대로 전문성을 갖추고 있다. 병사들은 입대 전 대학에서 고고미술사학과·고고학과 등 발굴 관련 전공을 했거나 치의학·의과대학 출신들이다. 이들은 2월16일부터 보름 동안 충북대에서 집체 교육을 받았다. 이때 병사들은 사람 뼈대 등을 집중적으로 익혔다. 이들은 일반인이 언뜻 구별하기 힘든 사람 뼈와 나무뿌리를 쉽게 구별한다.

병사들이 충북대에서 집체교육을 받은 것은 이 대학 박선주 교수(고고미술사학과)가 5년째 전사자 유해발굴 사업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형질인류학의 권위자인 박 교수는 이날도 발굴 현장에 나와 유해 수습을 지시했다.

발굴 현장에는 유골 3~4개와 신발 두짝이 땅 위로 드러나 있다. 병사들이 발굴용 삽으로 조심스럽게 유해와 유품을 찾고 있다. 내가 병사들에게 잇달아 지적을 받고 발굴 현장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는 게 안쓰러웠는지 박선주 교수가 새 일을 맡겼다. 가로 1m, 세로 30cm가량의 땅을 직접 파보라고 했다.

땅을 팔 때는 팍팍 파는 게 아니라 발굴용 손삽으로 비누 1장 정도의 크기와 두께의 땅을 잔디 떼내듯이 파야 한다. 자칫하면 유해를 훼손하거나 흘려버릴 수도 있겠구나 싶어 잔뜩 긴장해서 흙을 팠다. 흙덩어리에 덮인 단추 같은 작은 유품를 찾기 위해서는 흙을 하나하나 살펴봐야 한다. 언뜻 보기엔 돌이나 잔뿌리 같은 게 섞여 있었다.

하지만 나무뿌리와 사람 뼈를 구별하지 못하는 처지라 멋대로 흙을 버릴 수 없었다. 머뭇거리는 나를 지켜보던 발굴단 병사들이 ‘돌입니다’ ‘흙이 뭉친 겁니다’ ‘나무뿌리입니다’ 같은 판정을 내려줬다. 이들의 확인을 거치고 나서야 나는 안심하고 흙을 뒤로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뒤를 돌아보니 병사들이 이중삼중으로 다시 확인을 하고 있었다. 발굴반원들이 검사하고 난 흙을 뒤로 보내면 병사들이 육안으로 검사를 하고 있었다. 이 흙을 버리기 전에 체에다 놓고 털어 유해나 유품을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이런 식으로 언제 일을 마치느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병사들은 아무리 시간이 걸리더라도 ‘확인 또 확인’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래도 이번처럼 정확한 제보를 바탕으로 땅을 파자마자 유해와 유골이 드러나는 때는 드물다. 대부분 병사들이 며칠 동안 산을 헤매며 땅을 파지만 허탕을 친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50여년이 넘은데다 제보자의 기억도 정확하지 않고 그동안 각종 개발 등으로 지형이 많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나는 더는 발굴 작업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삽을 놓았다. 대신 붓을 들고 반쯤 발굴된 전투화 근처의 흙을 털어냈다. 발굴반 노행호 상사가 뭔가를 들고 육군 유해발굴 통제장교 고재룡 중령을 급하게 찾았다. 흙이 잔뜩 묻어 있었지만 개인 수첩이나 명함집 같았다. 고재룡 중령은 “신원을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해서 확인해보라”고 지시했다.

“떠오른다 네 얼굴이 꽃같이 별같이”

발굴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려면 인식표(군번)나 도장, 이름, 군번, 생년월일 등 개인 정보가 적힌 유품이 나와야 한다. 노 상사가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지만, 안타깝게도 속은 텅 비어 있었다. 종이 등이 들어 있었더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썩었을 것이다. 수첩 안 흙더미 속에 작은 벌레들만 곰지락거렸다.

병사들의 나이를 물어봤다. 82·83년생이 많았다. 대부분 20대 초·중반인 이들은 50년 넘게 땅속에 묻혀 있는 유해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유해발굴 체험을 마치고 따뜻한 봄 햇살을 맞으며 산길을 내려왔다. 문득 란 노래가 떠올랐다. 이 노래는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란 1절 가사가 유명하지만 나는 4절 가사를 더 좋아한다.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떠오른다 네 얼굴이 꽃같이 별같이.”

지금은 나무뿌리 같은 유골도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꽃 같고 별 같은 젊은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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