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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의 끝, 폭력과 두려움에 맞서

경쟁사회 틀에서 벗어나 낯선 길을 홀로 걷는, 양심적 병역거부자 김경묵 감독
등록 2014-10-17 06:15 수정 2020-05-02 19:27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20대 독립영화 감독이 있습니다. 20살에 첫 영화를 찍어 데뷔한 이래 9년간 8편의 영화를 찍고 캐나다 토론토 릴아시안영화제 최우수작품상(영화 )을 비롯해 수차례의 국내외 영화제 수상 및 초청 경력을 쌓았습니다. 올봄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24시를 그린 라는 영화를 내놓은 김경묵(29) 감독은 그즈음 병무청의 입영 통지를 받았고 병역거부를 선언했습니다. 곧 있을 형사재판과 당연히 뒤따를 감옥살이를 앞둔 그를 10월7일에 만났습니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 산울림소극장 카페 ‘수카라’에 자전거를 타고 온 그는 대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앳되고 고운 모습이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온, 앳되고 고운 모습

-첫인상을 보면 부모님이 자유방임에 예술적으로 키우신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어요.

=아니에요. 두 분 다 육체노동자였고 집도 가난해 자녀 교육에 신경 쓰지 않으셨어요. 자녀에게 특별한 기대도 없고 대학 교육도 꼭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덕분에 학원도 안 다니고 대신 혼자 있으면서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었죠.

-고등학교를 중퇴했어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학교를 다녀야 하나 고민했어요. 자의식이 생기면서 아무리 노력해도 소속감이 느껴지지 않는 학교를 계속 다닐 이유가 없었어요.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처음에는 반장도 맡아보고 노력했지만, 결국 지각과 조퇴를 반복하다가 자퇴를 하게 됐지요.

-학교가 왜 싫었나요.

=아마 폭력적인 문화 때문인 것 같아요. 중학교도 그랬지만, 고등학교 가서 체벌이 심해졌어요. 체벌을 굉장히 가학적으로 하는 선생님들이 있었어요. 말로는 ‘사랑의 매’라 하면서 사실 폭행 수준이었죠. 예를 들어 학생 두 명이 장난치다 걸리면 마주 보고 서로 빰을 때리게 했어요. 선생님이 만족할 때까지 점점 세게 때리라고 했고 약하게 때리면 벌칙을 다시 받아야 했어요.

-잔인한 폭력인데요.

=정말 무서웠던 건 지켜보는 다른 아이들이 킥킥대는 거예요. 진짜 재밌어서 웃는다기보다는 다른 반응을 할 수 없어서 그랬어요. 그걸 보며 여기가 끔찍한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생님뿐만 아니라 학생들도 마찬가지였죠. 일진이나 왕따 같은 폭력에 가담하지 않으면 방관자로 지켜봐야 했는데 너무 괴로웠어요.

많은 수상 경력을 가진 ‘중견 감독’

고등학교를 그만둔 그는 19살인 2004년에 라는 영화를 제작했는데 그 첫 영화로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 특별상을 받았습니다.

-영화는 어떻게 하게 됐나요.

=학교 그만두고 혼자 책 읽고 영화도 많이 봤어요. 시간이 많이 남으니까요. 많이 읽고 많이 보다보니 자연스레 공부가 됐어요.

-많이 본다고 다 감독이 되는 건 아닌데요.

=할 말이 많았죠. (웃음) 마음에 쌓아놓은 게 많아서 그걸 풀어놓을 공간이 필요했는데 마침 과 인연이 닿아 글을 썼어요. 막연히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더 근본적으로는 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통로를 갖길 원했는데 막상 글을 써보니 괴로웠어요. 매주 돌아오는 마감이 고문 같았어요. 어린 나이에 감당이 안 됐나봐요. 그래서 영화는 어떨까 시도해봤죠. 그 무렵 ‘다음세대’ 재단에서 프로젝트 공모가 있었는데 거기에 기획서를 제출해 당선됐고 지원금으로 영화를 찍었죠. 주변 친구들이 많이 도와줬어요.

-그 뒤 많은 수상 경력과 영화 제작 경력을 가진 ‘중견 감독’이 됐어요.

=아, 어색해요. 이 나이에 중견이라니. (웃음)

-그래도 열아홉에 경제적 독립은 힘들었을 텐데요.

=부모님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 이후로는 어떤 지원도 받지 못했어요. 오로지 생존하려고 별별 알바(아르바이트)를 다 했어요. 전단지 돌리기, 햄버거집 서빙, 장애인 활동보조를 해봤고 웨딩 촬영도 했어요. 글을 쓰면서 원고료도 받고요. 다행히 제 한 몸 먹고 지내는 정도는 할 수 있었어요. 물론 가난하게 살았죠. 지금도 돈을 거의 안 쓰고 지내요. 영화제 상금이 나오면 한두 달 쉴 수 있어서 좋고요.

-하지만 거주 문제에는 큰돈이 드는데요.

=서울에 올라왔을 때 한동안 떠돌아다녔어요. 아는 사람 집에 얹혀살기도 했고요. 알바를 했지만 거의 돈을 쓰지 않으니 조금씩 모이기는 해요. 지금은 떠돌지는 않아요. (웃음)

-청년세대의 불안을 다 경험해본 것 같아요.

=감히 말하자면, 제 삶이 20대를 대표하지는 않지만 20대의 가난한 삶은 겪어본 것 같아요. 지금도 돈을 되도록 안 쓰는 방식으로 살아요. 특별히 미래에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 없어요. 사람들이 미래에 대해 많이 불안해하잖아요. 저는 계속 불안하게 살았기 때문에 그냥 익숙하다고 해야 할까요.

고통 자체에도 힘과 배움이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지금 20대에게는 불안이 가장 큰 문제 아닌가요.

=꼭 20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사회안전망이 없는 것과 무한경쟁에서 오는 불안이 거의 전 세대를 압도하고 있잖아요. 제 주변에도 많은 사람들이 상담받으러 다니고, 어디를 가나 ‘힐링’이라는 말이 넘쳐요. 저는 ‘자기 자신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 것’이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문제가 무엇이든 자신과 이야기를 해봐야 하는데 스스로 질문하지 않는 거죠. 내면이랄까, 내적 자아가 점점 작아진다고 할까요. 인터넷에 지식은 널려 있지만 지혜가 필요한데 자신을 직면하지 못하는 것, 그렇게 할 수 없게 하는 사회 시스템이 더 문제인 것 같아요. 그런 질문을 하면 스스로를 괴롭히는 시스템이 돼버린 거죠.

-우리 경쟁사회는 틀을 벗어나면 영원히 패배할 거라는 암시를 끊임없이 주죠. 김 감독은 그 틀에서 과감하게 벗어났는데 어떤 20대보다 큰 성취를 이뤘어요. 어떻게 보면 아이러니가 아닌가 싶어요.

=결국 ‘성공’했다는 건데, 성공이 뭘까요? 저는 뭔가 성취하거나 몇십 년 뒤 어느 자리에 올라 다른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을 충족시켜주는 게 아니라고 봐요. ‘성공’을 자신이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고 원하는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끼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해도, 저도 그렇게 잘 살고 있진 않거든요. 오히려 매일 괴로워하며 살고 있어요. (웃음) 다만 고통 자체에도 많은 힘과 배움이 있어요. 만족하고 행복할 때보다 훨씬 더 많은 깨달음의 터전이 고통에 있는 것 같아요.

-낯선 길을 홀로 걷는 사람으로서 스스로에게 제대로 가고 있는지 질문을 하나요.

=가장 많은 배움을 주는 시기는 사실 가장 외로웠던 때예요. 삶이나 사회, 사람에 대해 고민하는 그때, 외부의 어떤 세계와 충돌을 겪어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계속 질문하는 과정은 굉장히 고통스러웠고 외롭기도 해요. ‘왜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을 매일같이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결국 그 질문을 통해 나 자신을 기준으로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건지, 그런 가치관을 깨닫게 됐죠. 병역거부를 결심하고 행동에 나서면서도 그런 것을 느꼈어요.

-병역거부는 언제 결심하게 됐나요.

=20대 내내 이 문제를 두고 고민했고요. 만약 영장이 나오면 거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번 봄에 영장이 나오자 바로 병무청에 의사를 밝혔어요. 그런데 막상 재판 절차가 시작되고 법원에 의견서를 써내려고 하니까 정신이 멍해지더라고요. 9월에 시작했는데 일주일 넘게 아무것도 못 썼어요.

-어떤 내용을 담고 싶었나요.

=지금까지 나온 성명서 같은 내용을 저는 못 담겠더라고요. 결국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내용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에 꽉 찬 감정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하니까 그것은 두려움이었어요. 군대 가는 게 너무 두려운 거예요. 학교를 그만둘 무렵, 학교에 갈 때마다 지옥에 끌려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는데요. 군대 역시 그런 감정을 일으켰어요. 군대가 학교보다 더 강한 정신적·물리적 폭력이 있는 곳인데, 거기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다는 공포가 컸어요. 이전의 병역거부자들은 전쟁 반대라든지 종교, 평화주의적 신념을 이야기했잖아요. 하지만 제겐 내면의 두려움이 가장 크게 차지한다는 걸 알고 그걸 정리해내는 게 힘들었어요. 이런 이야기를 의견서에 쓴다는 게 말이 될까 하는 고민이 들었죠.

김 감독은 법원에 제출한 의견서의 첫머리에서 두려움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의사이면서 평론가였던 마쓰다 미치오는 고통과 죽음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하는 두려움이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으로의 병역거부를 낳았다고 지적했다. 또한 침략전쟁에 가담하게 된 것도 사실은 이 두려움 때문이라고 기술한다. 병역거부와 전쟁 참가. 두려움은 역사를 구성하는 어떤 쪽의 세력도 될 수 있는데, 많은 일본 국민은 전쟁에 가담하는 쪽으로 기울었다.(도미야마 이치로의 중)”(www.facebook.com/conscienceless.things)

두려움 때문이라고 쓰면 ‘너는 체제 부적응자구나’ 이렇게 낙인이 찍히잖아요. 그것이 또 두려워 감히 글로 쓰지 못한 거였어요. 그러면서 이 체제는 사람에게 공포를 주면서 체제에 끼워맞추려 하는 것임을 깨달았죠. 이런 감정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병역거부자나 어쩔 수 없이 군대를 가야 했던 사람들이 다 한 번쯤 마주친 것이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했어요.

-전쟁의 두려움은 가능성이지만, 입대 거부로 인한 처벌은 매우 현실적인데요.

=학교는 그냥 거부하면 되었는데 이번에는 반드시 처벌이 따르고 그 처벌이 생각보다 더욱 두려워졌죠. 그 두려움을 이용해 결국 체제가 개인이 원하지 않거나 맞지도 않는 것을 억지로 따르도록 강요하지요. 올해 군 폭력 사건이 많이 알려졌는데, 맞는 사람도 때린 사람도, 방관했던 사람들도 그 시스템 안에서 스스로 반항 또는 저항을 하는 순간 다른 처벌이 기다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어요. 우리는 폭력을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군대 내에서는 그게 자연스러운 행위고 질서를 잡는 데 필요한 체제 유지 도구잖아요. 폭력을 부정하는 순간 자신은 열외가 된다는 것이 또 두려운 거죠. 결국 그런 폭력과 두려움의 순환 고리에서 개인은 아무도 저항할 수 없고 행동할 수 없어요. 그 고리를 빠져나가려면 일종의 ‘용기’가 필요한데, 지금까지 극소수의 사람들 외에는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어요. 힘든 일이고요.

동시에 이 문제를 고민하면서 지금까지 국가폭력이나 권력에 맞선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감정을 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어요. 민주주의의 틀을 만들기 위해 자기 자신을 내놓아야 했던 사람들이나, 강고한 시스템에 저항해야 했던 사람들이 국가폭력 앞에서 느꼈을 감정에 절실하게 공감했지요. 의견서를 쓰면서 그분들이나 앞선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공감과 연대의 감정이 복받쳤어요. 정말 감사했고, 그 점이 예전의 저와 많이 달라진 부분이에요.

-대학 미진학자에 병역거부자라는 삶은 사회의 ‘주류’에 영원히 포섭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시스템 밖으로 나온 사람이 더 많아져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무한경쟁 속에서 미래에 대한 가능성도 보지 못하게 하면서, 한편으로 그걸 자기 책임으로 돌리며 더 열심히 살라고 하잖아요. ‘너만 최선을 다하면 할 수 있다’는 메시지는, 결국 실패하면 자신의 잘못이라는 거죠. 그 때문에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불안해하며 우울증에 빠져 있거든요.

거기에서 발을 빼고 나름의 자기 기준을 설정하면요,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분명 있어요. 제가 그렇게 살고 있고요. 다른 방식의 삶을 다 살아본 건 아니지만, 이런 방식이 삶의 만족을 찾거나 자기를 실현하는 데 ‘성공적’이지 않을까 해요. 누군가를 무작정 따라가는 것보다 자신의 기준을 만들려 애쓰고 고민하고 그대로 살아보는 게 스펙 쌓기보다 낫지 않을까요?

그에게 다가올 법 집행 앞에서

그는 11월19일 형사재판을 받을 예정입니다. 병역거부자에 대한 예외 없는 판결 관행에 따라 1년6개월가량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될 것입니다. 복역을 마치고 나오면 그는 20대의 고비를 넘어 30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복역 뒤에는 30대인데, 본인의 영화는 뭐가 달라질 것 같아요.

=모르겠어요. 일단 감옥살이를 해야 하는데 그 생활이 물음표의 세계이기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 미지수예요. 그 변화가 궁금하기도 하지만, 하고 싶은 작업이 많은데 그것을 미루는 게 아쉬워요. 어떤 시기에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까 결국은 못하는 거죠.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위한 대체복무제도가 빨리 시행되기를 바랍니다.

끝은 또 다른 시작입니다. 가난했지만 누구보다 뜨거웠던 그의 청춘은 ‘병역거부’로 끝과 함께 새로운 시작을 열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작을 앞둔 그를 마음 깊이 응원하면서, 저 또한 이번 인터뷰로 지난 1년간의 연재를 끝내고 새로운 시작을 엽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독자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정연순 변호사, 녹취 김연희

*‘정연순의 말하자면’ 인터뷰를 마칩니다. 그간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과 수고해주신 필자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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