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룽나무를 서양에서는 ‘메이데이트리’(May day tree)라고 부른다. 노동절 무렵에 꽃이 활짝 피기 때문이다. 귀룽나무는 벚나무와 가깝다. 우리나라 산기슭에 그렇게 많이 자라도 가로수로 많이 심지 않으니 사람들이 잘 모른다. 그런데 귀룽나무를 알게 되면 그 화려한 왕벚나무가 좀 시시해질 수 있다.
내가 사는 경북 봉화의 시골 마을에 귀룽나무 꽃이 피기 시작했다. 뭉게뭉게 새하얀 구름이 피어오르듯이 환상적이다. 리듬감 있는 시 같기도 하고 문장이 좋은 산문 같기도 하다. 그 꽃 풍경을 보고 나면 누구라도 귀룽나무를 향한 사랑이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유년 시절을 보낸 경북 성주의 시골 마을에도 커다란 귀룽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를 동네 사람들은 구름나무라고 불렀다.
귀룽나무의 어원은 두 가지다. 내가 고향 마을에서 들었던 것처럼 꽃이 구름처럼 눈이 부시게 피어오른다고 구름나무에서 귀룽나무가 됐다는 것과 아홉 마리 용이 승천하듯 구룡(九龍) 형상으로 꽃이 피고 줄기와 가지가 넘실댄다고 구룡나무에서 귀룽나무가 됐다는 것. 식물분류학을 공부하며 귀룽나무가 정식 이름임을 알고 난 뒤에도 내 애칭은 여전히 구름나무다.
이 무렵 귀룽나무를 하루라도 못 보고 지나가면 나는 자기 전에도 귀룽나무 꽃이 자꾸 생각난다. 꽃 피는 시간이 짧은 걸 알아서 더 애탄다. 사실 귀룽나무가 나를 가장 설레게 하는 때는 지금보다 이른 봄이다. 겨울을 갓 통과한 마른 숲에서 저 홀로 연둣빛 새순을 내밀며 서 있는 귀룽나무가 내 눈에는 꽃 필 때보다 더 많이 빛나 보이니까. 우리나라 낙엽수림에서 가장 먼저 잎을 틔우는 대표 나무가 귀룽나무인 것이다.
귀룽나무의 분포 범위는 대단히 넓다. 한반도 지리산 이북의 산골짜기부터 일본과 동북아시아, 히말라야를 거쳐 스칸디나비아까지 유럽 전역에 산다. 심지어 자연적으로는 살지 않았던 북미 대륙에도 건너갔다. 1950년대 알래스카에 정원수로 도입된 이후 귀룽나무는 애써 심어 가꾸지 않아도 알아서 더 많은 번식에 성공했다. 미국 당국은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귀룽나무를 두고 “당신은 북아메리카 토착종을 밀어내는 침입종”이라며 심심한 우려를 표한 적도 있다.
벚나무와 같은 혈통이라 귀룽나무는 꽃도 열매도 벚나무 비슷하다. 벚꽃을 닮은 작은 꽃 수십 개가 북극여우 꼬리처럼 길게 늘어져서 새하얗게 핀다. 그러면 인간인 나를 포함해 다양한 종류의 동물이 홀려 귀룽나무 꽃 앞으로, 꽃 속으로 찾아간다. 벌을 비롯해 여러 곤충의 도움으로 수정에 성공한 귀룽나무는 머지않아 까만 열매, 버찌를 맺는다. 버찌는 영어로 체리다. 귀룽나무 열매를 새들이 특히 좋아해서 귀룽나무의 또 다른 이름은 ‘버드체리’(Bird cherry)다. 벚나무보다 열 배 훨씬 넘는 버찌를 귀룽나무는 포도송이처럼 매단다. 참새, 울새, 어치와 같은 비교적 덩치가 작은 새들이 주로 찾아와서 먹고 그 씨앗을 퍼뜨린다. 새뿐만 아니라 담비와 오소리와 여러 설치류도 귀룽나무 열매를 먹는다. 그런데 씨앗을 안 뱉고 오도독오도독 씹어 먹으면 동물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벚나무 혈통의 식물 씨앗에는 아미그달린(Amygdalin)이라는 복합성분이 있어서다. 흔히 매실과 살구씨에 있다고 알려진 독성 화합물이다. 그 자체로는 독이 아니지만, 특성 효소를 만나면 청산가리 성분으로 분해된다. 식물 체내의 성분은 어떻게 흩어지고 모이냐에 따라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어떤 식물이 어디에 좋다는 말에 꾀여 함부로 알은체하다가는 큰코다칠 수 있으니 식물 앞에서는 겸손, 또 겸손해야 한다.
슬라브족이 사는 여러 지역에서 귀룽나무는 아주 먼 과거부터 사람들의 삶과 밀착돼 있었다. 열매는 시럽과 잼과 술이 됐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씨앗에서 추출한 성분을 증류주에 넣어 고급 수제 진을 만든다. 시베리아에서는 귀룽나무 열매를 씨앗 통째로 말린 뒤 빻아서 일종의 밀가루를 얻는다. 아몬드와 체리, 카카오 향기가 은은히 감돈다고 하는 그 가루로 페이스트리와 롤과 케이크를 그 지방 사람들은 옛날부터 만들어 먹었다. 귀룽나무 케이크는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초대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옐친의 아내 나이나 옐친이 1991년 레시피를 공개한 이후 한동안 큰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야생에서 직접 식재료를 수집하며 미국에서 유명해진 셰프 앨런 베르고가 귀룽나무 열매를 채집하고 말리고 빻아 마침내 근사한 케이크를 만드는 전 과정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게시글을 나는 인상 깊게 읽은 적이 있다.
온갖 종류의 현대 물품이 갖춰지기 전에 유럽에서 귀룽나무의 쓰임은 실로 다양했다. 열매와 나무껍질은 양모와 어망을 물들이는 염색제가 됐다. 목재는 나무 상자, 수납장, 도구의 손잡이와 같이 작은 물건을 만드는 재료가 됐다. 특히 안약, 기침약, 빈혈약 등 여러 질병을 다스리는 약재로 두루 쓰였다. 그래서 유럽의 전통의학 분야에서는 귀룽나무로 항염증제를 개발하자고 말한다. 귀룽나무의 열매와 잎과 나무껍질이 이미 선조들로부터 오랜 세월 쓰이며 검증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니 전통의학뿐만 아니라 현대의학에서도 널리 쓰이길 바란다면서.
우리 할머니는 귀룽나무 어린잎으로 만든 특별한 봄나물 요리를 어린 내게 선사했다. 새순을 고이 모아서 데친 뒤 물에 담가 쓴맛을 우려내고 엇비슷한 시기에 나오는 회잎나무 순과 섞어 간장 조금, 깨소금 조금, 다진 마늘 조금, 들기름 쪼르륵, 쪽파 오송송 얹어 조물조물 무치는 방식으로. 나는 할머니가 차려준 그러한 밥상을 받아먹고 크면서 식물을 익혔다. 귀룽나무 새순을 먹고도 몇 주는 지나야 두릅나무와 개두릅나무(음나무) 새순이 빼꼼 묵은 가지를 뚫고 나온다는 걸 그렇게 배웠다.
귀룽나무 잎과 가지에서는 맵싸한 냄새가 난다. 꺾이거나 상처가 나면 향은 더 짙어진다. 그게 일종의 소독제 구실을 한다는 것을 유럽 사람들은 일찍부터 알았을 것이다. 귀룽나무 가지를 꺾어 현관문 앞에 두면 전염병을 멀리할 수 있다고 믿었던 걸 보면. 귀룽나무는 그 어떤 나무보다 자신을 지키는 일에 철두철미한 나무다. 누가 할퀴거나 몸에 상처를 내려고 덤빈다면 그 특유의 냄새를 아끼지 않고 뿜어낸다. 귀룽나무의 그러한 방향(芳香)은 살균과 살충 작용을 한다.
자신의 씨앗을 지키려고 귀룽나무는 아예 독을 품고 살기도 한다. 앞서 말한 아미그달린을 구성하는 독성물질 시안화수소가 씨앗에 들어 있는데, 쓴맛이 아주 강하다. 동물의 혀는 쓴맛을 감지한다. 그건 씨앗을 먹지 말고 뱉으라는 귀룽나무의 경고다. 귀룽나무의 말귀를 알아들어야 동물들은 살아남을 수 있다.
귀룽나무가 자신을 보호하는 또 다른 신통한 방식은 잎자루에 있다. 잎과 가지를 연결하는 가느다란 자루인 잎자루에 겨자씨만 한 밀선이 사마귀처럼 오돌토돌하게 두 개 돋아 있다. 밀선(蜜腺), 다시 말해 꿀을 만드는 분비샘은 세포와 세포의 얽힘에서 비롯된다. 거기서 귀룽나무는 꿀을 빚어 개미를 유인한다. 귀룽나무를 비롯해 거의 모든 벚나무 혈통에는 꿀샘이 꽃뿐만 아니라 잎자루에도 있다. 개미는 그 잎자루 꿀샘을 온전히 차지하고 싶어서 주변을 빙빙 돌면서 다른 곤충은 얼씬 못하도록 엄호한다. 밀선이 상처라도 입으면 귀룽나무는 밀선을 더 만드는 치밀한 전술을 쓴다. 그러면 개미는 더 열심히 귀룽나무를 지키는 일에 매진한다.
귀룽나무는 빨리 큰다. 용틀임처럼 가지를 이리저리 비틀거나 꼬면서 어떨 때는 뿌리 아닌 곳에서도 싹을 내고 가지를 쑥쑥 키워 올린다. 여럿이 어울려 자라며 대형 구름 떼 모양을 연출하기도 하고 홀로 근사한 수형을 뽐내기도 한다. 도시의 공원이나 대규모 녹지 공간에 군락으로 심어도 좋고 독립수로 심어도 좋다. 기후위기 시나리오는 앞으로 귀룽나무가 전보다 더 넓게 퍼져 살 거라 예측한다. 그러니 자꾸만 더 따뜻해지는 도시 숲에는 귀룽나무가 제격일 것이다.
귀룽나무 꽃 피는 걸 보고 있으면 나는 시나 산문을 읽고 싶고 쓰고 싶어진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로시니 갤러거의 첫 시집 <귀룽나무>(Bird cherry)가 2023년 초 영국에서 출간됐다. 시인 로시니는 2022년 스코틀랜드 북트러스트가 수여하는 젊은 작가상을 받았다. 첫 시집에는 19편의 시가 강처럼 달처럼 나무처럼 있다. 그중 시집과 제목이 같은 시 ‘귀룽나무’를 나는 귀룽나무 아래서 여러 번 읽었다.
정체성을 알아내려/ 그 이름을 찾아본다/ 꽃그늘을 드리우는/ 창문으로/ 버드체리 혹은 스위트체리-/ 잎의 곡선으로부터/ 나는 그 어린 모든 가능성을 쥔다/ 내 마음속 버찌//
만약 내가 고조할머니를 만난다면/ 그이의 언어로 말하는 이름을 나는 알지 못하리/ 버드체리 혹은 스위트체리/ 어두컴컴한 데서, 꽃잎은 부유한다/ 바다 거품처럼/ 땅은 기억한다/ 과거에 쓰이던 모든 것을-/ 탄소, 파열, 꽃잎/ 지난달 만개한 하얀 꽃은/ 부풀어 올라 하늘을 지우고 말았다//
로시니의 시처럼 지금 귀룽나무 밑에 가면 하늘을 꽃으로 채우는 마법이 펼쳐진다. 제자리에 있으면서도 아주 멀리 가보게 된다. 귀룽나무 꽃이 수직운(積亂雲)으로 발달하는, 목하 오월이다.
허태임 식물분류학자, <나의 초록목록> 저자
*연재 소개: 식물학자가 산과 들에서 식물을 통해 보고 듣고 받아 적은 익숙하지만 정작 제대로 몰랐던 우리 식물 이야기. 4주마다 연재.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비상계엄 찬성 극우 세력만 보고 달려가는 국민의힘
나경원 “이러니 부정선거 의심 받아”…선관위 비난
조진웅 “내란수괴가 판칠 뻔… 진정한 영웅은 국민들”
“강철 같은 빛”…BBC, 계엄군 총 맞선 안귀령 ‘2024 인상적 이미지’ 꼽아
“역시 석열이 형은 법보다 밥이야”…모두가 행복했을 텐데
“윤석열 관저로 향하겠다”…트랙터 투쟁단, 남태령서 시민들과 합류
유승민 “망하는 길 가는 국힘…‘목사님이 하는 당’과 뭐가 다르냐”
현실의 응시자, 정아은 작가 별세…향년 49
영하 11도 속 헌재로 간 30만명 외침…“상식적 판단 믿습니다”
‘계엄 모의’ 무속인 노상원 점집…소주 더미에 술 절은 쓰레기봉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