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두붓집 사장님, 정치와 바람났네!

새정치 비례대표로 서울시의원 된 망원시장

상인 김진철 당선자 “절대 쫄지 않겠다”
등록 2014-06-17 14:34 수정 2020-05-03 04:27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이번 6·4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의원에 도전한 새정치민주연합 비례대표 후보 가운데 특이한 경력을 가진 분이 있습니다. 비례대표 후보 순위 2번인 김진철(48) 당선자는 서울 마포구 망원시장에서 부인과 함께 17년간 두부를 직접 만들어 팔아온 상인입니다. 전통시장 상인이 왜 시의원 선거에 나서게 됐고 의원이 된 뒤 어떤 일을 하려 하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평일인데도 활기찬 기운이 넘치는 망원시장, 시장 안에 자리잡은 상인회 사무실에서 김 당선자를 만났습니다.

비례대표 시의원, 설마 되겠어? -오랫동안 운영하던 두붓집을 버려두고 (웃음) 시의원이 된 이야기부터 듣고 싶어요.

=새정치민주연합 을지로위원회에서 이번 시의원 선거에 비례대표를 한 명 추천하고 싶다고 상인회 회장님에게 제안했어요. 사실 회장님이 저보다 사리 판단이 훨씬 뛰어난 분이라 본인이 수락해도 됐을 텐데 하룻밤을 심사숙고하더니 다음날 저에게 연락하셨어요. 아무래도 제가 하는 게 좋겠다면서요.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고민이 많았을 듯한데요.

=처음에는 이렇게 확정적인 순위로 비례대표가 될 줄 몰랐어요. 그때는 비례대표가 몇 명이나 뽑히는지 몰랐고, 2번을 받을 줄도 몰라서 그냥 서류만 일단 접수시킨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승락한 거였어요. 설마 되겠나 싶어 집사람과 상의도 안 했고요. 막상 공천심사위원회에서 2번을 배정받았다는 연락을 받은 뒤 주위에서 이게 얼마나 대단한 자리인가 막 이야기하니까 그때부터 좀 마음이 무거워졌지요.

김진철 당선자가 비례대표로 추천된 것은 홈플러스 입점반대 투쟁에서 망원시장 상인들이 보여준 성과를 시정에 반영하기 위한 을지로위원회의 노력의 산물이었습니다. 2011년 망원시장 근처에 홈플러스가 입점하려 하자 시장 상인들은 주민들과 함께 입점저지대책위원회를 만들어 2년간 끈질기게 싸웠습니다. 그 결과 15개의 판매제한품목 설정과 홈플러스익스프레스점의 폐지를 내용으로 하는 상생협약을 체결했는데, 이 투쟁은 경제민주화 투쟁의 모범적 성공 사례로 꼽히고 있습니다. 김진철 당선자는 대책위원회의 총무를 맡았습니다.

-홈플러스와 상생협약을 맺은 지 1년이 됐는데 시장 사정은 어떤가요.

=15개 품목 판매 제한은 상징적인 것이었지 그 자체로 큰 효과가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지하철 환승 지점에 설치했던 홈플러스익스프레스점을 폐지시킨 게 효과가 있었지요. 시장상인회도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적극 노력했어요. 대형마트가 쉬는 둘째·넷째 휴일을 노려 점포들에 세일 품목을 내놓게 해서 전단지도 만들어 그걸 동네에 뿌리고요. 사실 대형마트는 미끼상품을 내걸면서 손님을 끌어오는데 시장은 그게 잘 안 됐거든요. 그렇게 노력했더니 지금은 홈플러스 싸움을 할 때보다 오히려 매출이 늘었어요.

-대형마트가 옆에 있는데도 그렇다니 놀라워요.

=시장에서는 점포마다 각자 수익을 따지니까 함께 모여 행동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세일 품목을 내놔야 하는데 그러면 당장 수익이 떨어지는 거죠. 그런데 지금 회장님이 가게마다 돌아다니며 설득했습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대형마트보다 싸다는 이미지를 줘야 소비자가 ‘아, 이용해보니까 좋다’ 이렇게 되는 게 아니냐고요. 쉬운 일이 아닌데 오히려 홈플러스 싸움을 하면서 상인들 사이에 단결력이 생겼어요. 상인회를 중심으로 각종 행사에 협조하고 적극 홍보하니까, 정확한 통계가 있진 않지만 슈퍼 중엔 손님이 배로 늘어난 곳도 있어요. 수익률을 낮춰서 그만큼 돈을 더 번 것은 아니고요.

싸우고 나니 남는 건 단결력

홈플러스 입점 저지 투쟁의 힘은 시들어가던 전통시장을 살렸고 결국 두붓집 아저씨를 시의원으로 만들어냈습니다. 그렇지만 당사자로서는 처음 해보는 일이라 걱정도 많을 것 같습니다.

-시의원으로서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은 없는지요.

=처음엔 많이 걱정했어요. 시의회 업무에 대한 기초지식도 별로 없는데다, 제가 고등학교만 졸업해서 과연 이런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해서요. 그런데 제 걱정을 듣고 주위에서 ‘걱정하지 마라. 네 뒤에는 을지로위원회 45명의 국회의원이 있고, 전국유통상인연합회와 회장님, 이분들이 너를 가만히 안 둔다. 자꾸 써먹으려고 이것저것 해보자 할 거다’ 하시더라고요. 우리 망원시장에서도 자꾸 이렇게 하라고 귀띔해줄 거고요. 이런 분들이 제 뒤에 있는데 그 대표성을 가지고 간 저를 가만두겠느냐고 하시면서 모르는 건 배우면 된다, 이러시는 거예요. 그 뒤 자신감을 갖고 ‘절대 시의회에 가서도 쫄지 않겠다!’ 이러죠. (웃음)

-시의회에서 어떤 일을 하고 싶으세요.

=소상공인, 재래시장, 골목점포, 상가임대차 문제… 할 일이 너무 많죠. 망원시장만 해도 시설을 현대화하고 장사가 좀 되는 것 같으니까 임대료가 막 올라가고 있어요. 점포 입장에서는 수익률을 낮추면서 손님을 유치한 거라, 손님이 늘었지만 수입은 그만큼 늘어난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건물주 입장은 안 그렇더라고요. 이 문제에 집중해 시의회 차원에서 상가임대차보호법을 보완해주는 일을 하고 싶어요. 가장 중점을 두고 싶은 것은 상인들과의 소통이에요. 그동안 상인 조직은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데도 모래알 조직이었어요.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니까 일단 시장으로 와서 도와달라고 하죠. 그런데 사진만 찍고 갈 뿐, 상인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은 없었습니다. 제가 소상인 대표로는 처음 진출하는 거라고 해요.

-그런가요. 처음이라는 게 놀라워요.

=저도 놀랐는데, 지금까지 이런 사례가 없었다는 거죠. 이렇게 많은 상인이 있는데요. 서울상인연합회라고 상인들의 조직이 있기는 한데 지금까지 상인들의 권익을 위해 싸우는 일에는 소극적이었어요. 대형마트가 들어오고 동네슈퍼, 전통시장 상인들이 무너지면서 전국유통상인연합회가 발족된 뒤 적극적으로 정부에 요구하고 싸우기 시작한 거죠. 제가 그 덕분으로 시의회에 나가게 된 거고요. 앞으로 제 역할은 정치 분야에서 상인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실질적 구심점을 만들어내는 거라고 생각해요.

일본의 ‘100년 가게’, 우리는 왜 없을까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결국 올바른 정치가 중요하다는 건가요.

=일본 같은 나라는 100년이 넘는 가게들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없어요. 왜 그럴까요. 정부 차원에서 그런 가게가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지원이 전혀 없었던 거죠. 우리나라는 상인들에 대해 자본의 논리로 쭉 밀어붙여만 왔어요. 그런데도 상인들은 자기 가게가 있고 현금을 매일 만지고 하니까 원래 좀 보수적인데다 잘 몰랐던 거죠. 이 지역만 해도 홈플러스가 4개 들어설 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위기에 몰려서야 겨우 깨달은 거죠. 정부 돈 몇 푼 받는다고 그게 시장을 살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요. 경제민주화를 하겠다고 약속해놓고 헌신짝 버리듯 하는 정권에 기대는 정신 상태로는 안 되거든요. 유통상인연합회가 을지로위원회나 시민단체와 연대해 적극적으로 싸우니까 유통관련법이 조금이나마 발전했다는 것, 상인들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이끌고 요구해야만 정부는 따라온다는 것을 알게 됐죠. 저는 그걸 엮어 하나의 구심점으로 더 발전시키고 싶어요.

김진철 당선자는 고등학교 졸업 학력에 신체장애를 갖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왔을 그의 이력이 궁금해졌습니다.

-어릴 때 ‘나는 커서 시의원이 될 거야’ 이런 건 아니셨죠. (웃음)

=제가 3살 때 소아마비에 걸렸어요. 그때는 전혀 걷지 못했어요. 잘 뛰어놀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지니까 부모님이 저를 업고 전국의 병원을 다 다니셨어요. 소아마비 수술을 잘하는 박사가 미국에서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가 넉넉지 않은 살림에 전답 두 필지를 팔아 수술을 시켜줬어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걷게 되어 학교를 다닐 수 있었는데, 아버지가 매일같이 저를 자전거에 태우고 등교시켜주셨어요. 너는 몸이 안 좋으니 공부를 열심히 해서 판사나 의사같이 펜 굴리는 일을 하라고 늘 말씀하셨는데,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아버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지금 아주 뿌듯해하셨을 것 같아요.

=그러셨겠죠. 그 뒤 어머니가 혼자 7남매를 키우며 정말 고생하셨어요. 저는 그 와중에 실력도 안 되면서 돌아가신 아버지 말씀대로 하려고 3수까지 하며 한의대만 가려고 했어요. 결국 어느 날 더 이상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포기하고 삼육재활원에 가서 금은세공업을 배웠어요. 처음에는 기술보조로 일하면서 기술도 익히고 급여도 받고 나름 괜찮았는데 1997년에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가 터졌죠. 다른 곳도 타격이 컸지만 귀금속 수요가 엄청 줄었어요. 온 국민이 금을 내다파는 상황인데 누가 주문을 하겠어요. 그때 서른 중반이었는데 앞으로 아무리 돈을 모아도 가게를 못 열겠다 싶어 다른 것을 해봐야겠다고 결심하고 두부를 만들어 팔던 형의 도움을 받아 가게를 연 거죠.

가족의 끈끈한 사랑과 도움 외에 당선자가 지금껏 버텨오기까지는 부인의 도움이 무척 컸다고 합니다. 20살 나이로 결혼한 부인은 공동화장실을 써야 하는 연립주택에서 단칸살림방을 차린 뒤 분윳값을 벌기 위해 오토바이로 우유 배달에 나섰을 뿐 아니라, 다리가 불편해 육체노동이 쉽지 않은 남편을 대신해 매일 두부를 만들고 임신 중에도 30kg이 넘는 소금 배달까지 했다고 합니다. 형제들이 당선자의 장애 때문에 두부가게를 내는 것을 반대했을 때도 당당하게 ‘제가 도울게요’라고 말해 설득했고, 망원시장에 터잡은 것도 우유 배달을 하며 익힌 시장 상인들과의 안면이 많은 도움이 됐다고 합니다.

막 화내는 아내에게…-말씀을 들어보면 거의 부인께서 당선자를 만든 게 아닌가 싶어요.

=저 같은 장애인과 결혼을 결심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요. 저는 사실 결단력이 부족한 편인데, 집사람은 제가 망설일 때마다 과감하게 저를 밀어줬어요. 그 힘으로 여기까지 온 거예요. 늘 고맙고 어떻게든 집사람의 말을 존중하고 사소한 거라도 꼭 상의하며 살아왔어요. 그 덕에 오늘 이렇게 좋은 일도 있는 듯해요.

-홈플러스 입점 저지 투쟁에 나서기 전까지는 어떠셨어요.

=장사한 지 17년 됐지만 저도 내 가게, 내 건강, 우리 가족만 생각했거든요. 집사람 덕에 가게도 그럭저럭 잘됐고요. 그런데 어느 날 전임 회장님이 저보고 상인회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했어요. 그게 2011년이었는데 교육도 받고 일을 해보니까, 상인 한 사람이 잘나서 아무리 노력해봤자 넘어설 수 없는 구조적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됐어요. 그때부터 상인회 일에 점점 빠져들었는데 홈플러스 싸움이 난 거죠. 총무를 맡았는데 알고 보니 모든 뒤치다꺼리를 다 해야 하는 거예요. 그때 집사람과 매일 싸웠어요. 가게를 돌볼 시간이 없으니까요. 집사람이 말하기를 ‘당신은 여자하고 바람이 안 났을 뿐이다’라고 했어요. 그저 고개 숙이고 야단 다 듣고 통사정하고, 그렇게 싸움을 끌어왔어요.

-지금은 이해해주시나요.

=홈플러스 싸움이 끝나고 망원시장이 잘되는 걸 보면서 당신이 그렇게 희생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 아니냐고 말해주는데 고맙더라고요.

-그런데 시의원 입후보 문제를 미리 상의하지 않으셨다고요.

=그렇게 확정적인 순위로 추천될 줄 몰랐거든요. 집사람이 그 이야기를 듣고 속상했는지 술 먹고 와서 막 화를 냈어요. 자기 멋대로 한다고요. 정말 엄청 사정을 했어요. (웃음) 이런 기회가 평생 언제 주어지겠느냐, 일단 기회가 주어졌으니 역량은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배워가며 해보겠다면서요. 덧붙여 ‘당신이 안 도와주면 내가 이런 일을 어떻게 하냐’고 했어요. (웃음)

-결국 설득에 성공하셨군요.

=다른 집도 그렇지만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명절 이틀만 쉬고 계속 저와 집사람이 번갈아가며 가게를 운영해왔어요. 두부 만드는 일을 도와주시는 분이 있지만 빠질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제 제가 빠지면 살림도 가게도 아내 혼자 해야 하니까 정말 미안하죠. 저는 4년 뒤 시장으로 다시 돌아올 거예요. 그래서 집사람에게 ‘당신이 흔들리지 않고 가게를 잘 지켜줘야 내가 돌아올 수 있다’고 사정했어요. 그랬더니 집사람이 말하기를, ‘4년 뒤에 다른 생각 하면 죽는다’. (웃음) 시의원이 돼도 일요일에는 가게를 도우려고요. 평일은 서울시민의 세비를 받고 일하니까 사사로이 가게 일을 도울 수 없어요. 주말은 시의원이라도 쉬는 거니까 그때 한두 시간이라도 도와줘야죠.

4년 뒤 다시 시장으로 돌아올 것 -사무총장이 시의회로 가버리면 상인들이나 회장님도 섭섭해할 것 같아요.

=그분들 말씀이나 의견을 열심히 들어야죠. 망원시장 상인회가 매주 화요일 밤 10시에 회의를 해요. 저보고 시의원 하면서도 이 회의는 꼭 참석하라셔서 어제 6·10 항쟁 기념식을 마치고 다시 여기 와서 회의하느라 너무 피곤해서 늦잠을 잤어요. (웃음)

대화를 하다보니 당선자의 부인을 꼭 만나고 싶어졌습니다. 사무실을 나와 두붓집으로 찾아갔는데 아쉽게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대신 그 길에서 처음에는 평범한 가게 주인이던 당선자를 상인회 일에 뛰어들게 한 전임 회장님을 만나 인사했습니다. 반갑게 인사하는 그의 뒤로 가게 아주머니가 우리를 보며 밝게 웃습니다. 최초의 소상인 출신 시의원을 배출해낸 자부심과 기쁨이 역력히 번지는 웃음입니다.

김진철 당선자의 이야기는 저에게 익히 들어오던 옛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평범한 사람이 삶의 의미를 깨닫고 끝내 많은 사람들의 앞에 서게 되는 숱한 이야기들입니다. 그 한 명의 주인공이 탄생하기까지는 삶의 풍파를 견디고 힘이 돼준 아내, 새로운 길로 이끌거나 자신의 자리를 기꺼이 양보해준 선배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함께 싸우며 그를 키워낸 민중이 있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의 응원과 격려를 팽팽한 돛에 바람으로 가득 받아 시정의 바다로 배를 띄우는 주인공의 첫 항해를 적극 응원합니다.

변호사 정연순, 녹취 강선일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