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자위권 행사에 대한 내각 결의에 따라 한-일 관계는 갈등으로 치닫고 있는 한편, 남북관계는 해빙의 기운이 조금도 돌지 않고 있습니다. 한반도가 구한말과 같은 외교적 상황에 처해 있다는 우려가 어색하지 않은 이때, 참여정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장, 통일부 장관을 지낸 이종석 박사가 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참여정부 시절 치열한 외교 현장과 우리 내부의 여러 모습을 통해 현재의 상황을 성찰해보고자, 경기도 성남 세종연구소 연구실에서 저자를 만났습니다.
-책을 쓰겠다고 생각하신 건 언젠가요.
=본래 책을 쓸 생각은 없었어요. 그 시대의 기록은 당연히 노무현 전 대통령이 쓰셔야 하는 건데 2009년에 대통령이 서거하셔서 비망록을 남길 수가 없잖아요. 그때부터 저라도 비망록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준비 기간이 길어져 이제야 책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미국도 부담스러워하는 의존 심리-책에서 강조하신 게, 외교안보의 핵심 문제는 우리 내부의 종속성에 있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미국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미국이 아니면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 국가이익을 위해 동맹이 있는 것이고, 조금은 다르기 때문에 공조하는 것이며,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협상을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협상 과정에서 한-미 간에 이견이 조금이라도 불거지면 국내에서 먼저 ‘어떻게 하려고 동맹을 위험하게 만드냐’는 의견이 강하게 나옵니다. 그게 우리의 운신 폭을 좁히는 형국이 되니까 결과적으로 국가이익을 지키는 게 너무도 어렵습니다. 미국 사람들도 어떨 때는 그 의존 심리를 부담스러워할 정도예요 대표적인 예가 인계철선인데, 미군이 휴전선이나 서울에서 철수하면 안 되는 이유가 북의 기습 남침 때 미군이 자동으로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지요. 노 전 대통령이 가장 싫어한 말 중 하나였습니다. 남의 나라 국민을 인질로 삼는 그런 부도덕한 게 어딨는가, 우리가 스스로 지켜야 하며, 그리고 부족한 부분을 도와달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대미 의존 심리는 국방이나 외교 분야에 집중된 것은 아닌가요.
=물론 그 분야가 가장 뿌리 깊다고 할 수 있지만 언론, 관료사회, 나아가 우리 사회 전반의 문제라고 봅니다. 심지어 진보 쪽에도 있어요. 예를 들어 전략적 유연성에 관해 우리가 협상을 통해 노력해서 합의해오면, 우리는 그 합의를 지켜야 하지만 미국은 뭐든지 다 할 수 있으니까 약속을 안 지킬 거라고 미리 생각해버리고 정부의 합의를 미국에 마치 주권을 넘기기라도 한 양 격렬하게 비난하죠. 일종의 진보사대주의라고나 할까요.
-아무리 어려운 강대국과의 관계에서도 협상의 여지는 있다는 것인가요.
=부시 행정부는 냉전 이후 역사에서 가장 일방적이고 패권적인 정부였어요. 그런데 부시 정부가 북한에 대해 가지고 있던 군사적 제재 대안을 우리 정부가 온갖 노력으로 포기하게 해서 한반도에서 전쟁 가능성을 크게 낮추고 9·19 공동성명(2005년 9월19일 6자회담에서 북한이 모든 핵무기를 파기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 국제원자력기구(IAEA)로 복귀한다고 약속)도 도출했습니다. 아무리 강하고 일방적인 미국 정부라 하더라도 한반도 문제에 대해 우리가 중심을 가지고 노력하면 우리 이야기를 경청할 수밖에 없는 쪽으로 세상은 변해왔습니다.
일본에 대한 우려, 솔직하게 전해야-지금 한-일 관계가 어렵습니다. 과거사 문제도 안 풀린 상태에서 일본이 내각 결의로 자위권 행사를 가능하게 했는데요.
=이번 일본의 자위권 문제를 대하는 정부의 태도는 문제가 많습니다. 식민지 침탈과 그로 인한 고통의 역사적 경험에 기초해 일본이 집단 자위권을 행사하겠다는 방침이 아시아 평화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며 일본의 입장 변화를 강력하게 비판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본이 집단 자위권 행사를 의결하는 날 한-미-일 합참의장이 별일 없는 양 같이 모여 회의를 하는 게 지금의 현실이에요. 대일정책은 정치와 군사, 외교적인 것에는 엄격하게 대하고 경제나 사회·문화 교류는 계속 발전시키면서 이원적 전략을 쓰는 게 기본인데, 박근혜 정부는 말로는 일본의 군사화를 경계하면서 엉뚱하게도 이 상황에서 거꾸로 군사협력을 하고 있단 말이죠.
-대안은 무엇일까요.
=일본의 군사력 강화는 일본 정부의 의지인 동시에 미국의 대중 전략과 아시아 지역 군사비용 절감 등과도 연결돼 있지요. 그러나 일본에 미국의 역할 일부를 위임하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위험하고 아시아 평화에도 도움이 안 됩니다. 우리는 제국주의 침탈에 대해 일본이 반성하지 않으면서 군사화 경향을 가속화하는 현 상황의 위험성을 직시하고, 미국에 이런 우려를 계속 솔직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정리하는 방책은 어렵더라도 중국까지 포함하는 동북아 다자안보 협력을 지향하는 거죠. 다자안보·공동안보라는 건 일본과 미국과 중국과 북한까지도 나중에는 서로 침략하지 않는다는 걸 전제로 해서 안보적인 협력을 구축해나가는 겁니다. 그런 틀을 만들어가면서 미국에도 그 틀 밖에서 일본과 군사협력을 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해야 합니다. 우리로서는 한-미 동맹을 건강하게 발전시켜야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일본의 군사력 팽창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무조건 지지할 수도, 지지해서도 안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자안보·공동안보 구조를 만들어가는 노력밖에는 우리가 안보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과거 문제 해결에서조차 공동의 기반이 없는데 현재와 미래의 다자안보 체계가 실현 가능성이 있을지 계속 회의가 듭니다.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역사 문제가 수시로 돌출하면서 다자 협력을 향한 일련의 노력을 계속 무너뜨리고 있다는 점이지요. 한편 동북아가 큰 경제 규모를 가지고, 엄청난 인적·물적 교류를 하는 등 공동의 이해관계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상황을 묶어보면 늘어나는 경제 교류 등 공동의 이해관계에도 불구하고 이를 뒷받침할 정치·안보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게 이 지역의 핵심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이런 질곡에서 벗어나려면 역사나 영토 문제가 발생하면 아무것도 안 된다고 미리 포기하지 말고, 그 문제들이 미치는 영향 범위를 일정하게 잡아놓고 그것들이 갈등을 확산하지 않도록 제어하면서, 다른 한편에서 이를 원천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해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정부뿐만 아니라 경제·사회, 민간 분야도 같이 해나가야 합니다. 동북아시아에서 정부 간 네트워크도 제 기능을 못하지만 민간 네트워크도 너무 취약합니다.
-대미 의존성을 지적하셨는데, 그렇다면 바람직한 한-미 관계는 어떤 것일지요.
=한-미 관계는 ‘고속 성장하는 중국에 우리가 잘 대응해나가기 위해서’라는 새로운 맥락에서 그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중국이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 않게 하는 견제판으로서 한-미 동맹이 중요한 자산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이걸 위해 가장 중요한 전제는 호혜적이고 수평적인 한-미 관계로 가는 것인데, 그 핵심 요소로 우리 안의 대미 의존적 심리 구조가 깨져야 합니다. 건강한 한-미 관계가 되면 한-미 동맹을 굳이 문제시할 필요가 없는 거죠. 한-미 동맹을 잘하면서 한-중 협력을 긴밀히 하는 것, 그리고 이 두 가지가 동북아 다자 협력이라는 틀 안에서 작동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겁니다.
핵 문제, 남북관계 개선의 선결 조건 아냐-현 정부는 미국과의 혈맹관계를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방치형 외교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현 정부가 전략적 안목이 없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본질적으로 그런 건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못돼 있다고 봅니다. 지금 문제는 정부의 외교 전략이 일관되지 못하다는 것이지요. 일본과의 관계에서 일본의 군사적 확장을 우리가 강력하게 견제해야 하는데 그 부분에서는 되레 흐물흐물하고 다른 분야에서는 굉장히 강경하거든요. 이게 어떤 원인으로 인한 것이고, 뭘 의미하는지는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는데, 그중 하나가 미국이지요.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미국은 우리가 설득할 수 있는 지점이 많이 있는 나라예요. 그리고 일본의 군사화 반대에 대해서는 우리가 부동의 명분이 있어요. 정확한 논리로 대응하면 미국 정부도 우리 말을 그냥 무시할 수 없는데, 지금은 그런 노력도 안 한 채 너무 쉽게 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남북관계 이야기로 가보죠. 현 정부 초기까지 말씀을 아끼신 걸로 아는데, 지금은 어떤 평가를 하고 계신지요.
=박근혜 정부는 역대 정권 중 남북관계 개선을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여건을 가지고 출범했습니다. 북한이 지금처럼 자기 발전의 실마리를 대외관계에서 찾겠다고 한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당선자 시절에 있었던 북핵 실험이 준 강박관념 때문인지, 북을 움직일 수 있는 많은 레버리지를 활용하지 못하고 있지요. 현 정부는 북이 핵과 경제를 같이 발전시키겠다고 말하는 이상 남북 대화가 의미가 없다는 식인데, 이는 재고해야 한다고 봅니다. 어차피 핵 문제는 우리 혼자 풀 수 있는 게 아니고 20년의 역사 속에서 쌓여온 문제입니다. 핵 문제는 남북의 치열한 군사적 대결, 안보 위협 위에 핵이라는 것을 하나 더 얹은 형국이기 때문에, 그 문제가 설령 해결된다고 해도 우리가 전통적인 안보 위협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핵과 남북 간 군사적 긴장 문제, 이 둘을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마치 핵 문제를 해결해야만 남북관계가 해결되는 것처럼 말하면서 문제가 복잡해진 거죠.
-미국 입장에서도 남북 간 대화가 나쁘지는 않을 듯한데요.
=남북관계 개선에 부시 행정부는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어렵게 설득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바마 정부는 동맹의 의견을 무시한 부시 정부를 비판하면서 출발했기 때문에 우리 정부가 의지를 가지면 어렵지 않게 설득할 수 있어요. 미국을 설득해서 6자회담 재개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박 대통령이 역사적 소명의식과 성취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큰 업적을 남길 수 있는 상황인데, 안타깝게도 그걸 안 하고 있네요.
-대북 강경 기조와 달리 어느 순간 ‘통일대박론’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하는 등 일관성도 의심스러운데요.
=초기에는 박 대통령이 이명박 전 대통령처럼 ‘비핵개방 3000’ 이런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심 기대도 했죠.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통일대박론까지 나왔고요. 통일대박론이라는 게 좀 경박스러워 보여도 의미 있는 말이거든요. 이런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이를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방법론이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한반도 프로세스라고 하면서 ‘프로세스’가 없잖아요. 동북아 평화 구상을 얘기하는데 동북아 평화 문제의 걸림돌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냉전이 해체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반도 평화체제라는 말은 절대 못 쓰게 해요. 결과적으로 미사여구적인 정책담론을 내놓았는데 현실에서는 반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지요.
정책담론 내놓고, 현실서는 역주행-말은 그렇게 하고 실제로는 반대가 된다면 일종의 인지부조화가 아닐까요.
=박 대통령이 본래부터 북을 꺾어야 한다고만 생각한 건 아닌 거 같고, 잘해보자고 했는데 몇 번 도전적인 상황이 오니까 해법을 찾지 못하고 그쪽으로 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긍정적 해법을 찾으려면 전략적 안목을 제대로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걱정스럽습니다. 국방과 안보가 다른 점은 국방이 물리적 방어(디펜스)의 개념을 기초로 한다면 안보, 즉 안전보장은 국방에 대화·협상 등 외교적 능력을 더해 평화를 만들고 증진해가는 것인데, 박 대통령이 이를 담당하는 안보실장을 임명하는 것을 지켜보면 안보를 디펜스와 동일시하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평생 디펜스만을 하던 분들이 안보실장으로 임명되면서 협상과 대화와 다양한 창조적 아이디어로 상대방을 설득하는 가능성을 닫고 있고, 그것이 전략적 안목의 부재로 나타나는 게 아닌가 우려됩니다.
-통일로 가는 과정에서 일본이나 다른 나라들의 영향은 어떨까요.
=일본이 한반도의 통일을 원하겠느냐 하는 건데, 어느 나라도 열렬히 원하지는 않는 게 냉정한 현실이겠지만, 그래도 영어로 하면 ‘낫 배드’(not bad) 이렇게 얘기하는 나라는 미국 하나 정도 아닐까 싶습니다. 일본은 한반도에 단일국가가 등장하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일본이나 중국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서 통일에 대한 의지가 있고 나름대로 확고한 입장을 만들어낸다면 중국이나 일본을 얼마든지 설득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 통일국가가 만들어지고 중국에 위협이 되지 않는 나라가 된다는 믿음을 줘야 하고, 그것은 여러 정부에 걸쳐 지속적인 전략적 대화를 통해서만 가능한 거예요. 중요한 건 우리가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이나 입장, 전략을 가지고 이 문제에서 우리 공동체가 분열하지 않고 하나의 마음으로 움직이느냐인데, 그게 없는 것이 더욱 불행인 거죠.
평화·자주·균형, 진보와 보수 떠난 상식-참여정부에서 아쉽고 미진했던 점도 있을 텐데요.
=대일 관계에서 국민 정서 같은 걸 조금 더 생각해서 신중한 고려를 하지 못한 게 아쉽고, 그 외에는 통일·외교·안보 정책보다는 언론관계에서 많은 안타까움이 있어요. 초기에 너무 많은 일이 터져서 늘 백척간두에 서 있는 심정이었지만, 그걸 떠나서라도 원칙적으로 국가가 올바른 전략과 미래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다면 그 상황을 있는 대로 써줄 수 있도록 언론과 관계를 유지했어야 하는데, 그게 이유야 어찌됐든 부족했고 미숙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통해 국민이 참여정부에 대해 좀더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부분은 무엇일지요.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진보와 보수라는 이념 이전에 공동체 공동의 가치를 추구하고 싶어 했던 사람이에요. 우리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데도 가장 못 가지고 있는 것이 ‘평화’였고, 가장 취약했으면서 제대로 살기 위해 꼭 필요했던 것이 ‘자주’였으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균형’이 필요했다고 봤던 겁니다. 평화와 자주와 균형, 이것은 진보나 보수의 가치와는 상관없는 상식이고 공동체의 가치였는데, 당시 능력 부족으로 그랬지만 국민에게 그 진정성이 다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이 아쉽고 저도 대통령 참모로서 그 부분에서 많이 죄송합니다. 이 책이 그런 진정성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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