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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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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 소비를 만나게 하라

노동환경건강연구소의 김신범 실장
“생산과 소비는 함께 안전해져야 한다”
등록 2014-04-14 13:32 수정 2020-05-03 04:27
정용일

정용일

원진레이온 사건을 아십니까. 안전설비 없이 레이온을 생산하다가 수많은 노동자가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숨진 사건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직업병 문제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사건이죠. 노동자와 시민단체의 연대와 투쟁의 결과로 1999년 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복지관이 설립됩니다. 그 뒤 15년 동안 줄곧 노동자의 건강권과 작업환경 문제에 매달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의 김신범(44) 실장. 그를 만났습니다.

마트 노동자에게 의자를 놓아주어도 - 연구소에서 쭉 근무하신 거죠.

= 그때는 10년 넘길 줄 몰랐는데 (웃음) 벌써 15년이 넘었어요.

- 인원은 어떻게 되나요.

= 20명이 조금 넘어요. 화학물질센터, 근골격계질환센터, 직업환경의학, 분석실과 교육센터. 교육센터는 우리가 만드는 내용을 노동조합에 전달하는 일을 하죠.

- 지금껏 해온 일을 짧게 소개한다면.

= 산업재해, 직업병에 걸린 사람들을 지원해왔어요. 우리 사회가 직업병에 대한 인식이 정말 낮아서요. 예를 들어 같은 작업을 반복해서 나타나는 근골격계 질환이 무슨 직업병이냐 했어요. 그걸 직업병으로 인정받게 하는 거죠. 정부가 제시한 발암물질 목록이 없었어요. 체계적이지 않았고요. 2010년경 연구소가 여러 전문가들과 협력해 민간 차원에서 처음으로 발암물질 목록을 만들어 발표했죠. 이제는 발암물질뿐만 아니라 생식독성물질, 환경호르몬까지 포함시키는 쪽으로 발전하고 있어요.

- 시민들과 함께 환경미화원 건강권 문제를 제기했고 마트 노동자들에게 의자 놓아주기, 피자 30분 배달제 없애기 같은 캠페인도 인상적이었어요. 성과가 있었나요.

= 여론의 반향을 일으켰죠. 그러나 반쪽의 성공이었어요. 싸움을 하며 절실히 깨달았어요. 노동자 문제는 결정적으로 스스로가 나서야 한다는 사실을요. 마트 노동자가 사용자에게 “의자 줬잖아, 근데 왜 못 앉게 하는 거야. 나 앉을래”라고 싸우지 않는 이상 의자는 흉물이 돼버리는 거예요.

- 작업환경에 대한 노동자의 권리 의식이 필요하다는 말인가요.

= 의외로 현장에서 만난 노동자들은 자신의 권리에 대해 주저하는 게 있어요. ‘아, 우리가 그런 것까지 이야기할 수 있어?’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임금수준에 대한 감수성은 높은데 정작 하루 종일 일하는 작업환경에 대한 감수성은 별로 높아지지 않은 것 같아요.

-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은 자연스럽게 길러지지만,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은 전혀 교육받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 그게 크죠. 한 사람이 중첩된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잖아요. 현장에 가서 보면 노동자들이 노동자라는 생각을 내려놓고 있어요. 여기서 시간을 때우고 나가서 재미있게 살겠다는 생각이죠. 자신의 삶은 노동 현장에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이 노동자로서 자리매김하고 자신의 권리에 예민해질까,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 그런 측면에서 노동환경건강연구소의 15년을 평가한다면요.

= 노동현장에서 직업병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연구소도 그렇고, 정부도 그렇고요. 돈이 궁한 사람들이 조사비라며 우리에게 돈을 모아서 주고, 그러다보니 연구소 재정은 늘 힘들었어요. 아무리 뛰어다녀봐야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한계가 있고요. 노동조합도 없고 힘없는 사람들은 아예 만날 수도 없었죠.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갈 것인가, 한계를 느끼던 중에 생산과 소비가 완전히 분리돼 있다는 것에서 답을 찾았어요.

국가는, 회사와 노동조합은 뭐했나- 어떤 계기로요.

= 석면 베이비파우더 문제 기억나세요? 2009년 아기들의 몸에 발라주는 파우더에 석면 성분이 들어 있다는 뉴스가 나왔죠. 그때 저도 어린아이를 키우고 있어서 정말 놀랐어요.

- 왜 일어났죠.

= 석면 탤크는 광산에서 채취하는데, 만일 어떤 광산에서 생산된 탤크인지를 알고 수입 여부를 결정하도록 처음부터 시스템이 구비돼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죠. 그 사건을 보면서 국가는 뭐했나, 회사와 노동조합은 뭐했나 싶었어요. 결국 소비자의 안전은 안전한 생산에서 나오는 거잖아요. 소비자가 기업과 노동현장에 강력하게 요구해야 하는데, 우리는 이걸 공장 안에서 노사 간의 문제로만 풀려 한 거죠.

- 노동과 안전의 문제에 시민들의 협조와 동의를 얻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깨달음이죠.

= 사람들이 아픈 건 이 공장 저 공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개별적으로 이 공장의 사장이 나빠서가 아니라는 걸 알았죠. 우리 사회 전체가 노동자를 병들게 하고 소비자와 시민들의 무관심이 그런 노동자를 양산한다는 깨달음을 얻었어요. 생산과 소비는 함께 안전해져야 한다는 인식을 우리 사회에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 그 뒤 활동 방향이 좀 바뀌었겠네요.

= 여전히 연구와 조사를 하지만, 생활협동조합이나 시민단체에 공장을 이해시키는 작업을 해요. 노동자에게는 그들이 소비자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고요. 그래서 금속노조는 올해 발암물질과 관련해 이런 슬로건을 걸었어요. ‘생산을 바꿔 노동자와 소비자를 발암물질로부터 지키자.’

- 결국 기업을 어떻게 감시·견제할 것인가의 문제로 이어지는데요.

= 법률을 잘 정비하는 것도 중요하죠. 우리나라에서도 최근에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이나 화학물질관리법, 유해물질관리법 등이 개정되었어요. 그걸로 다 해결되는 건 아니에요. 이 문제는 정부 탓만이 아니에요. 우리 스스로가 화학물질이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상황이잖아요. 사실 시중에 있는 화학물질의 90%는 독성실험도 안 돼 있어요. 그냥 쓰는 거예요.

- 문제가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거죠.

= 유럽에서는 ‘노 데이터, 노 마켓’(No data, No market) 원칙을 지키고 있어요. 독성 정보와 용도 정보가 없으면 시장에 진입시킬 수 없다는 거죠. 꼭 써야 하는 유독성 물질은 어쩔 수 없이 그 용도에만 쓸 수 있게 정부가 목록을 발표하고 기업이 신청해 쓰게 하는 거예요. 우리나라에도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건을 통해 도입이 됐어요. 그렇지만 제대로 시행되려면 국민의 인식과 감시 수준이 높아져야 해요.

- 하지만 기업은 압력이나 나쁜 규제로 치부하죠.

= 그게 돈의 힘이죠. 기업의 핵심 임원들도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물질이 위험한 줄은 알아요. 그렇지만 대개 거짓 정보를 만들어내고 애매한 영역을 만들죠. 소비자가 늪에 빠져 허우적대도록 하는 거예요. “이게 위험하대.” “무슨 소리야, 아니라는 논문도 이렇게 나와 있는데.” 이렇게 위험한지 아닌지 싸우는 영역을 끊임없이 생산하죠.

엄마들의 ‘PVC 없는 마을 만들기’ 운동- 그런 의미에서 시민단체나 연구소의 역할이 중요한 것 같아요.

= 미국이나 우리나라나 법률에 화학물질 배출량 정보를 공개하도록 돼 있죠. 그런데 미국은 시민사회단체가 그 정보를 잘 가공해서 주민들이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 확산해요. 우리나라는 지금껏 그렇지 못했어요. 불산 누출 사고가 났을 때 반경 2km 내에 어떤 일이 생기는지, 주민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정보가 전혀 없었어요. 법률만이 해결책이 아니에요. 틀이 만들어지면 그 틀을 통해 문제를 찾아낸 다음 그것을 해결해야겠다는 정치적 압력이 지역사회에서 형성되도록 해야 해요.

- 결국 교육·협력의 네트워크가 얼마나 강한지에 해결의 실마리가 달린 거네요.

= 탐욕의 고리에 파열을 낼 수 있는 것은 결국 감수성의 문제예요. 우리 스스로 용납하지 않을 수 있는 힘. 그 힘은 노력해야 만들어지는 거죠. 화학물질로 인한 피해와 사고 속에서 국민의 공포나 두려움, 실망 이런 것들은 더 커지고 있죠. 하지만 나아가 ‘이 문제는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어’라고 말해야 하거든요. 지역 차원에서나 생활 곳곳에서 스스로 깨어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마련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 전망은 어떤가요.

=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쉬운 예를 들어보면, 우리가 쓰는 지우개 중 많은 것들이 고무 지우개가 아니라 PVC 지우개예요. 이걸 부드럽게 하려고 가소제를 넣는데 이게 환경호르몬이거든요. 무게의 40%나 차지하죠. 비닐장판부터 벽지까지 다 그런 종류예요. 환경호르몬에 노출되면 성조숙증·불임 등 질병이 생겨요. 이거 안 쓸 수 있어요. 유럽은 금지 추세고 아예 PVC 없는 도시를 선언하는 시장도 나와요. 우리 소비자가 무지하니까 기업이 생산하는 거예요. 마을에서 엄마들이 모여서 ‘PVC 없는 마을 만들기’ 운동을 하는 거죠. 아는 사람들만 공동구매를 하는 게 아니라 학교랑 교섭해서 학교 앞 문구점에 갖다놓게 만들어요. 학교는 학부모 통지문을 만들어 바쁜 부모들에게도 알려주고 권해주는 거죠. 환경호르몬 없는 지우개를 사면 그걸 만드는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셈이죠. 생산부터 소비까지 운동이 체계적으로 기획돼야 결국 현장 노동자가 암에 안 걸리겠구나라고 생각해요.

- 노동과 소비의 새로운 만남이군요.

= 저도 오랜 시간을 노동과 소비를 분리해서 봤죠. 노동자는 노동자이고 소비자는 소비자일 뿐이었는데, 이제 노동자의 전체 인생, 전체 가족을 포함하도록 시야가 트였어요. 노동자이면서 소비자이기도, 엄마이면서 딸이기도 한 사람이 보이는 것 같아요.

선생님의 매를 막아주지 못한 아버지

김신범 실장은 1989년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개척교회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인천 판자촌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그때의 경험이 자신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 신앙의 측면에서인가요.

= 아뇨. 교회에 딸린 집에서 살았는데, 밤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오셨어요. 남편에게 맞고 도망쳐와서 울며 기도하는 걸 매일 보면서, 저건 하나님한테 할 얘기가 아닌데, 남편을 패고 도망을 가든지…. (웃음) 가난과 폭력의 반복을 보면서 굉장히 비판적이 됐다고 할까요. 그와 동시에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아파하는 심성이랄까 그런 걸 어릴 때부터 갖게 됐어요.

- 똑같은 상황이라 할지라도 모두 그렇게 되는 건 아니죠.

= 다행히 부모님이 제가 가난을 받아들이게 키우셨어요. 어릴 때 학교에 돈을 제때 못 내면 선생님이 때렸어요. 그래도 전교 1등이었는데 맨날 맞고 오는 거예요, 돈을 못 냈다고. 서러워서 아버지에게 한 번만 안 맞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돈 찾아가지고 오신다는 거예요. 근데 안 오셨죠. 돈을 찾아서 간판집을 지나가는데 교회 간판이 오래전부터 걸려 있는 게 생각나서 그 돈을 주고 찾아줬다는 거죠. (웃음) 미치겠는데 어쩔 수가 없죠. 그렇다고 아버지가 잘못한 것 같진 않아요. 때리는 선생님이 이상한 거였죠.

- 대학에 진학해서는 어땠나요.

= 학생운동을 어떻게든 안 해보려고 도망다녔어요. 가난이 지긋지긋하고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으니까 돈을 많이 벌어드리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또 잘 안 되더라고요. 고민하다가 결국 운동을 열심히 하고 노동현장으로 들어가기로 했는데 그게 또 안 됐어요. 먼저 공장에 들어간 선배가 그만 정리하고 나와버린 거예요.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솔직히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어요. 아, 이제 공장에 안 들어가도 되겠구나. (웃음) 그러면서도 내 자신이 너무 비겁하지 않느냐는 생각에 1년간 술만 먹었어요. 그때 다른 선배가 노동자와 함께하는 길이 그것만 있는 게 아니라면서 산업보건을 공부해보라고 권했어요. ‘내가 과연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졸업하고 공부를 하게 됐죠.

이야기를 듣다보니 장년의 김신범의 얼굴 속에서 청년의 모습을, 그 웃음 속에서 소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파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의기가 늘 떠나지 않았던 그 모습을요.

-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으세요.

= 아이들을 처가에 맡겨 키우면서 이렇게 생각했어요. 나는 노동자들의 건강을 지키는 일을 하니까, 내가 사는 마을에서는 아무것도 안 해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요.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어요. 삶이든 일이든 사람들이 있고 만나는 곳에서는 모든 책임이 발생하고 그 책임에서 눈을 돌리며 다른 곳에서 노동자와 함께하는 길을 찾는다는 것은 착각임을 깨달았어요. 마을에서 책임을 다한다는 건 뭘까, 이런 고민과 책임을 다하는 사람들이 만나는 마을, 그런 관계를 가진 마을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이 있어요.

‘송파구의 가난’을 이야기해봐요- 지금 어디에 살고 계신가요.

= 송파구예요. 거기에서 세 모녀가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어요. 송파구가 겉으로는 제법 사는 동네처럼 보이는데 가난하고 힘든 사람이 많아요. 이 일을 계기로 우리 동네에서 함께할 수 있는 일을 한번 해보자, ‘송파구의 가난’이라는 주제로 고민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보자고 하고 있어요. 몇 년이 걸리든 지역에서 풀어나가는 방향으로요. 이런 문제를 고민할 때마다 결국 가난한 분들에게 나는 뭘까? 결국은 어릴 때 본 동네 아주머니들이 던져주었던 문제가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 것을 느껴요.

정연순 변호사, 녹취 전다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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