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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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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강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극

등록 2025-01-04 17:19 수정 2025-01-09 17:28
인도 파니파트 심라구지란 마을의 하천 인근에 사는 크리산 랄 샤르마(75). 그는 파니파트 헌 옷 표백 공장에서 나오는 폐수가 마을로 흘러들어 혈액암에 걸렸다. 한국의 헌 옷도 파니파트로 수출돼 표백된다. 한겨레 조윤상 피디

인도 파니파트 심라구지란 마을의 하천 인근에 사는 크리산 랄 샤르마(75). 그는 파니파트 헌 옷 표백 공장에서 나오는 폐수가 마을로 흘러들어 혈액암에 걸렸다. 한국의 헌 옷도 파니파트로 수출돼 표백된다. 한겨레 조윤상 피디


헌 옷 수거함에 옷을 버리고 돌아서면, 보통 우리는 그 옷을 잊습니다. 꽤 후련하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오래된 옷에서 풍기는 냄새와 먼지, 쌓인 옷더미를 보는 시각적 고통에서 해방됩니다. 사고 싶은 옷을 두기 위한 공간도 넓어지죠.

하지만 수거함 속 옷의 최후를 확인한다면, 마음은 무거워질 겁니다. 한겨레21은 153개의 옷·신발 등에 추적기를 달아 버린 뒤 이들의 경로를 추적한 취재(‘당신이 버린 옷의 최후’)를 했습니다. 헌 옷들은 개발도상국으로 수출되고 있었습니다. 옷은 말레이시아(10개), 인도(8개), 필리핀(6개), 타이·볼리비아(각 2개), 인도네시아·페루·일본(각 1개) 등에서 발견됐습니다. 특히 개발도상국에 간 옷들은 불법 소각되거나 매립될 가능성이 큽니다.

옷을 사고 버리는 일은 ‘지구가 아픈' 것은 물론이고 ‘사람을 아프게’ 하는 일입니다. 그 아픔이 주로 먼 나라에서 발생해 잘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많은 한국 옷은 인도 ‘헌 옷의 수도’ 파니파트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헌 옷을 재활용해 담요·커튼 등을 생산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옷의 색깔을 빼는 재활용 공장에서는 독성 물질이 든 폐수를 무단으로 방류합니다. 방류 지점 인근 심라구지란에 사는 크리산 랄 샤르마(75)는 이로 인해 혈액암을 앓고 있습니다. 이 마을에는 마비 증세가 오거나 심각한 피부병을 겪는 이들이 400여 명에 달합니다.

한국의 신발들이 향하는  타이 아라냐쁘라텟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신발들은 이 지역 중고품 시장인 롱끌르아에 갔다가, 팔리지 않으면 거대한 매립지에 버려집니다. 이 쓰레기에서는 유독가스가 나옵니다. 이 때문에 매립지에 화재가 자주 발생해 주민들은 고통을 겪습니다. 이런 매립지 화재로 이산화황이 다량 배출되고, 인근 주민 폐암 발생 위험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남아시아 암 저널, 2014)

개발도상국으로 옷 쓰레기를 보내지 않기 위해서는 대량생산 시스템이 바뀌어야 합니다. 의류 제조 기업이 필요한 만큼 옷을 만들게 하고, 생산 제품의 처리 과정에 책임지게 해야 합니다. 또한 재고를 폐기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 국가들에서는 이를 규정한 제도들이 마련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 논의가 멈춰 있습니다. 정부는 연구 용역을 통해 이 제도의 도입 필요성을 확인하고도, “장기적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국 패션 시장 규모는 49조6천억원(트랜드리서치, 2024)으로 성장세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은 ‘패션 강국’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패션 강국’ 한국은 먼 나라의 아픔에 이토록 무심해도 되는 걸까요. 세계 헌 옷 수출국 5위인 한국이 그 아픔에 크게 일조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박준용 기자 juneyong@hani.co.kr

 

한겨레21 통권호 ‘당신이 버린 옷의 최후’ 기사 모아보기

https://h21.hani.co.kr/arti/SERIES/3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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