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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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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만 한다, 농약으로만 ‘유기’ 판별

‘농약 쓰지 않으면 친환경’이라는 잘못된 공식 만들어낸 국가인증제,
오염된 땅 근원적으로 회복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등록 2022-12-31 21:56 수정 2023-01-01 08:36
2022년 12월22일 충북 괴산군 감물면 감물흙사랑공동체(영농조합법인 흙사랑) 회원 농부들이 흙사랑의 사무실 겸 작업장인 옛 감물중학교에서 유기농 관련 교육을 받기 위해 모였다.

2022년 12월22일 충북 괴산군 감물면 감물흙사랑공동체(영농조합법인 흙사랑) 회원 농부들이 흙사랑의 사무실 겸 작업장인 옛 감물중학교에서 유기농 관련 교육을 받기 위해 모였다.

“처음엔 북한에서 하는 ‘5호 담당제’(주민 다섯 가구마다 당 선전원을 배치해 감시하는 제도) 아니냐고 했는데, 한 번 모이고 바뀌었어요.” “농민 주도의 자기학습이랄까.”

2022년 12월22일 만난 윤영우(55), 이규웅(58) 두 농부는 ‘자주관리’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운을 뗐다. ‘자주관리’란 한살림의 생산공동체에 속한 유기농 농민들이 자기 농사가 친환경 기준에 맞는지 스스로 점검하고 교육하는 과정을 뜻한다. 이들은 충북 괴산군 감물면 감물흙사랑공동체(영농조합법인 흙사랑)에 속해 있다.

온통 눈으로 덮여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어오던 이날 오후, 흙사랑의 사무실 겸 작업장인 옛 감물중학교에서 만난 윤영우씨는 “1년에 네 차례 맘먹고 시간 내서 (생산자끼리) 다 같이 (필지를) 도는데, 이 농가가 어떻게 농사짓고 작황이 어떤지 알 수 있다. 농민들은 만나면 농사 얘기만 하니까 정보 나눔터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생산자-소비자 함께 참여하는 ‘자주인증’

자주관리는 국내 생활협동조합 가운데 가장 조합원 수(80만 가구)가 많은 한살림의 ‘참여인증’ 과정의 하나다. 생산공동체에 속한 농민들이 서로의 필지를 점검하고 회의를 열고 교육하다보니 ‘상호 학습과 정보 교류의 장’이 된다. 이규웅씨는 “농사짓는 이들은 거의 혼자 일한다. 남의 얘기를 들어도 또 각자 방식대로 하기 마련인데 자주관리를 하고부터는 다른 집 해놓은 것 보고 도입할 건 도입하고, 또 무언가 새롭게 시도한 사람이 있으면 자세히 물어보고 그런다”고 설명했다.

농한기인 이날 작업장에선 흙사랑 직원들이 얼마 전 수확한 감자를 ‘참여인증’ 마크가 붙은 투명비닐백에 담고 있었다. 윤씨와 함께 찾은 인근 밭에선 쌓인 눈 아래 풋거름작물인 수단그라스와 호밀이 자랐다. 풋거름작물은 잎과 줄기를 비료로 쓰기 위해 키우는 작물로, 화학비료 대체용이다.

2000년 처음 생산공동체를 결성했고 지금은 70여 가구가 속한 ‘흙사랑’에선 감물면을 중심으로 25만 평(82만6400㎡)가량의 땅에서 감자, 브로콜리, 양배추, 옥수수, 고추, 표고버섯 등 40가지 작물을 재배한다. 농가 수가 많아 서로의 필지를 점검할 땐 가까운 8~10개 농가를 묶어서 한다. 한살림의 참여인증제는 2020년부터 정식 시행 중인데, 2022년엔 흙사랑을 포함해 61개 공동체가 1년 기한 인증을 받았다. 한살림은 향후 2~3년 안에 나머지 60여 개 공동체 모두를 참여시킬 계획이다.

불가항력을 농가가 증명하라?

현재 한국에서 친환경 농산물은 크게 ‘무농약’과 ‘유기’로 나뉜다. 무농약 농산물은 합성농약을 쓰지 않지만 화학비료를 일부 쓴 경우, 유기농산물은 합성농약과 화학비료를 전혀 쓰지 않은 경우를 이른다. 재배면적 기준으로 전체의 4.9%(2021년)가 친환경 농산물 경작지다. 기존처럼 농약을 쓰는 ‘관행’재배를 해오다가, 유기재배로 바꾼 경우엔 3년 이상 유기재배 방법을 따라야 유기로 인정한다. 토양에 쌓인 농약 탓이다. 농림축산식품부 산하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이 운영·관리하는 유기 인증은 생산계획서 등 서류 심사, 전문심사원이 농장을 방문하는 현장 심사로 이뤄진다. 인증은 1년간 유효하다.

문제는 이 제도가 ‘농약 검출’ 여부를 중심으로 이뤄진다는 데 있다. 과정을 보지 않고 결과만 본다는 것이다. 농약이 검출되면 인증을 취소할 뿐 원인을 찾아 개선하는 데는 인색하다. 2019년부터 인근 필지의 날림(비산) 같은 ‘불가항력 요인’으로 농약이 검출된 경우엔 2회까지 시정명령을 하는 것으로 제도가 바뀌었으나, 농가가 직접 불가항력 요인을 증명하는 일이 어렵고 절차가 복잡하다는 지적이 계속 나온다.

이러한 유기 인증제도의 한계를 넘어서, 먹거리의 생산·소비 주체가 직접 인증 과정에 참여하도록 한 것이 한살림의 참여인증이다. 인증신청→자주관리→자주점검→인증심의 등의 절차를 거친다. 먼저 인증을 신청한 생산공동체는 필지 점검 등 ‘자주관리’로 생산과정 전반을 관리한다. 공동체 구성원이 기준을 위반하면 개선 조치하고 더러는 징계도 한다. 소비자도 직접 참여한다. 일정한 교육과정을 이수한 소비자 조합원은 한살림의 실무자, 다른 지역 생산자와 함께 ‘자주점검’에 참여한다. 이들은 생산공동체의 자주관리 현황을 파악하고 표본농가를 점검하는 등 농산물 생산과정을 함께 살핀다.

소비자 조합원으로 자주점검 과정에 참여한 김보영 한살림 농산물위원회 위원장은 “참외 생산자와 벌꿀 생산자가 참외 수정 때 벌을 빌리고 차광막을 가져가 벌통 덮개로 쓰는 등 ‘농농교류’를 하는 과정이 신기했다. 생산지마다, 생산자마다 추구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고 각자의 노하우, 고집 같은 것이 있는데 그걸 주고받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더 신뢰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렇게 자주관리, 자주점검 과정에서 만들어진 자료를 바탕으로 외부 전문가까지 참여한 참여인증심의위원회가 열려 최종 인증 여부를 결정한다. “현재 국가 인증에선 농약이 안 나오면 좋은 거고 조금만 나오면 낙인찍는 방식인데, 그렇게만 해서는 유기농업의 정신, 과정을 다 담을 수 없거든요. (한살림의 참여인증이) 생산자와 소비자가 같이 풀 수 있는 미래지향적 방식이라고 생각해요.”(흙사랑 윤영우씨)

농한기인 이날 작업장에선 흙사랑 직원들이 얼마 전 수확한 감자를 ‘참여인증’ 마크가 붙은 투명비닐백에 담고 있었다.

농한기인 이날 작업장에선 흙사랑 직원들이 얼마 전 수확한 감자를 ‘참여인증’ 마크가 붙은 투명비닐백에 담고 있었다.

2019년 법 개정으로 검사 더 강화

이해당사자의 참여로 인증을 부여하는 이러한 방식을 ‘참여형 보장제’(PGS)라 한다. 제3자 인증 방식인 국가 차원의 인증제와는 구별된다. 전세계 유기농업운동 지원 조직인 국제유기농업운동연맹(IFOAM·아이폼)은 이런 방식의 인증을 지지·독려한다. 연맹은 전세계적으로 프랑스, 브라질, 뉴질랜드 등 78개국 150여 개 단체가 ‘참여형 보장제’를 운영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한살림 이외 국내 다른 생협들도 참여인증 같은 방식의 정식 인증 과정까진 아니지만 자주관리·자주점검과 비슷한 조합원 참여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승규 한살림 품질관리본부장은 “2019년 관련 법 개정 과정에서 유기농에 대한 정의가 단순히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 것으로 바뀌면서 잔류농약 검사가 더 강화된 측면이 있다. 1년에 한 번 와서 영농일지랑 현장에 제초제가 없는지 보고 시료 검사하는 것으로 끝나는데, 어떤 면에선 친환경의 의미가 바뀐 것이다. 소비자까지 단순히 농약을 쓰지 않는 걸 친환경으로 생각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유기농에서 중요한 건 오염된 땅을 회복하는 것으로, 유기농이 발달한 나라에선 농약이나 화학비료뿐 아니라 자원순환, 지역순환, 무경운(땅을 갈지 않는 농법) 등에 초점을 둔다. 잔류농약은 여러 요소 중 한 부분에 불과하다”고 덧붙였다.

실제 유엔식량농업기구(FAO), 세계보건기구(WHO)가 함께 설립한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코덱스)나 미국, 유럽연합의 유기인증 규정 등을 보면 농약 잔류 기준이 없거나 이를 강제하지 않는다. 한국이 0.01ppm 이상 유해성분이 검출되면 인증 부적합 판정을 내리는 것과 상반된다. 농산물 생산 용수도 한국은 농업용수 이상의 수질이어야 하지만 코덱스 등은 농업 활동으로 수자원이 오염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고 할 뿐 수질 기준이 따로 없다.

뿌리 뽑아 보고, 지렁이 배설물도 보고

언뜻 외국의 유기농 인증제도가 한국보다 더 허술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농약 잔류량 같은 결과만 확인하는 것보다 생산과정을 확인하는 일이 실제 훨씬 어렵고 품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아이폼도 유기 인증이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대한 인증임을 강조한다.

아이폼의 유기농 심사 방법을 보면, 심사원은 작물의 잔재를 보고 영양 결핍이나 과다 징후가 있는지 판단한다. 작물과 잡초를 뽑아 뿌리 구조를 보고 침투력이 좋은지, 잔뿌리가 발달했는지 등을 살핀다. 콩과작물이면 질소 고정 구실을 하는 뿌리 상태를 특별히 점검하고, 토양의 냄새나 부식된 유기물질이 보이는지 등도 따진다. 지렁이와 지렁이의 배설물, 벌레와 진균류 같은 생물체의 활동 징후도 본다. 심사원은 이렇게 현장 생태계를 조사하고 농가에서 수집한 각종 농자재 구매내역서 등 근거자료도 확인한다. 한국처럼 토양, 수질, 생산물 등의 검사 성적서만 확인하지 않는다.

유기농법을 보급·확산하는 사회적기업인 흙살림푸드의 조완형 대표(경제학 박사)는 “요즘 전체 농산물의 30~40%에 대해 농약 검사를 하던데 아직 여러 물리적 한계와 유기농 취지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제도 운용이 기계적으로 이뤄진 측면이 있다. 유기농 인증제도는 원래 취지가 과정을 보는 것으로, 참여인증 역시 과정을 보기 위해 당사자 참여를 강조했다. 인도나 유럽 쪽 나라들은 ‘참여형 보장제’를 법제화하는데 우리도 이를 국가 인증과정에 넣어 제도화하는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괴산(충북)=글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사진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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