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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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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과 에코백이 가리는 세계

‘압축적인 넷제로’를 위한 ‘탄소중립기본법’ 만들기
등록 2021-11-18 16:25 수정 2021-11-19 03:14
기후위기를 말할 때 북극곰과 빙하를 인용하는 것이 가장 나쁜 정치다. 기후위기가 ‘지금’ ‘이곳’의 문제임을 가려버린다. MBC <북극의 눈물> 화면 갈무리

기후위기를 말할 때 북극곰과 빙하를 인용하는 것이 가장 나쁜 정치다. 기후위기가 ‘지금’ ‘이곳’의 문제임을 가려버린다. MBC <북극의 눈물> 화면 갈무리

사람이 죽었다. 더워서 죽었다.

황당한 문장이지만 문자 그대로 현실이다. ‘폭염에 일하던 건설노동자, 온열질환에 의한 사망’이란 보도가 마치 ‘전국 구름 많겠으나, 강원 영동 대체로 흐리고 가끔 비’와 다르지 않은 정보값의 문장이 됐다. 폭염 시기 어느새 사망사건은 연례적으로 바뀌는 날씨 정도의 무게로 취급됐다.

책임과 피해의 불일치를 바로잡는 것이 정의

기후위기를 말할 때 북극곰과 빙하를 인용하는 것이 가장 나쁜 정치다. 사실이 아니라는 얘기가 아니라 기후위기가 ‘지금’ ‘이곳’의 문제임을 가려버린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서두의 ‘온열질환자1’은 구급차에서 응급실로 이송된 뒤 가쁜 호흡을 내쉬며 알 수 없는 언어로 횡설수설했고 얼굴은 빨갛게 익었고 입술은 바싹 마른 모습이었다고 했다. 급히 체온부터 확인하니 무려 41℃가 찍혔는데, 통풍조차 잘 안 되는 공장에서 한낮 내내 일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 사람은, 너무 더워서 죽었다.

열대야가 심한 어느 여름 에어컨 없는 집에서 산 적이 있었다. 너무 더워서 도무지 잘 수 없었다. 문을 다 열어놓자니 안전이 불안했고, 닫아놓자니 숨이 막혔다. 저녁에 집에 가는 게 두려워 사무실에서 밤 12시까지 버티기도 하고 일찍 퇴근할 때는 커피숍에서 최대한 졸릴 때까지 시간을 보냈다. 그마저도 보름이 넘어가 만성 수면 부족에 시달리니 아예 짐을 싸서 에어컨 있는 친구집으로 피신을 갔다. 그때 나는 자고 싶다, 살고 싶다, 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이런 문명사회에서 벌거벗은 동물 같다는 느낌이었다.

고백하건대, ‘온열질환자 1, 2, 3…’이 응급실에 실려와 생사의 문턱에 있는 건설노동자 ○○○씨라는 구체적 사람으로 옮겨오기까지 내 옛 기억과 당시의 직관적 공포를 한번 통과하고 나서야 가능했다. 사무직 노동자인 나는 더위와 추위를 피할 공간이 있으므로 기후위기를 처절한 생존의 문제로, 지금-이곳의 문제로 인식하기에 이리 어렵다.

그러나 여성과 65살 이상 노인, 교육수준이 낮은 인구집단, 심뇌혈관이나 호흡기계 질환 등 만성질환자가 폭염 위험에 더 취약한 것은 팩트다. 현재 추세로 온실가스가 배출되는 경우(RCP 8.5) 우리나라에서 2040년대 폭염에 가장 취약한 곳은 대구이고, 기초생활수급자가 가장 큰 피해를 본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이렇듯 기후변화는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지만 그 책임과 피해의 정도가 같지 않다.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 당사국총회에서 ‘공동의 차별화된 원칙’(CBDR·Common But Differentiated Responsibility)이라는 규범을 만들었다.

기후위기 문제에 대한 책임과 피해의 불일치를 바로잡는 것이 정의다. 국제구호개발기구 옥스팜과 스톡홀름환경연구소의 2020년 보고서에 따르면 1990년부터 2015년까지 탄소배출량 중 전세계 인구의 가장 부유한 상위 10%가 누적 탄소배출량의 52%, 최상위 1% 부유층은 15%의 누적 탄소배출량에 책임이 있다. 국내 상위 20개 기업의 온실가스 배출량이 우리나라 전체 연간 배출량의 63%를 차지한다(국가온실가스종합관리시스템, 2020). 에코백과 텀블러 사용 같은 시민의 작은 실천은 물론 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온실가스 배출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기업을 면책하는 논리가 된다면 이 또한 부정의한 구조를 재생산한다.

2050년까지 흔들릴 수 없는 법적 근거를

“국제사회와 함께 기후변화에 적극 대응해 2050년 탄소중립을 목표로 나아가겠습니다.”

2020년 10월28일 국회 본회의장, ‘2021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2050 넷제로(Net-zero·온실가스 순배출량 0)’를 선언했다. 본회의장에는 의원들의 환호와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성장주의·개발주의가 신화처럼 자리잡은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이른 시간 안에 국가 전략과 목표가 바뀔 수 있을지 몰랐다. 더구나 제조업 비중이 높은 한국에서 2050년까지 넷제로를 한다니, 국가 운영 원리의 근간이 완전히 바뀌는 순간이었다. 사실 ‘탄소중립사회’는 어디 일국의 근간만 흔들까. 이것은 석탄 중심 산업혁명에서 재생에너지 중심 녹색혁명을 이루는, 문명사적 대전환이었다.

그런데 말은 이렇게 해도 이 시기가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지는 체감될 리 없다. 내 뇌구조는 ‘얼떨떨 20 + 반가움 20 + 의구심 30 + 걱정 30’이었다. ‘선언’으로서 분기점이 만들어졌는데 그것이 듣기 좋은 말로 끝날지 우리 사회의 기틀이 될지는 이제부터 국회가 하는 일에 달렸다.

2050년까지 흔들릴 수 없는 법적 근거가 필요했다. 2009년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20년까지 온실가스를 배출전망치(BAU) 대비 30% 감축하겠다고 국제사회에 공언하고 녹색성장 선도국의 지위를 얻었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해 온실가스 배출량은 10% 가까이 늘어, 1993년 온실가스 배출량 증가율 12.2%를 기록한 이래 17년 만에 최고치를 찍었다(6억6900만t). 온실가스 감축 목표만을 발표한 채 이를 현실화하는 세부 정책을 실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선언 못지않게 온실가스 감축 목표의 이행 점검을 명확히 하는 절차를 법에 담는 일이다. 그래야 어느 정부가 들어서도 온실가스 감축이 법적 구속력을 갖게 된다. 국회가 입법할 때 30년 앞까지 내다보며 법을 만드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다이내믹 코리아’이니 더욱 그렇다. 앞으로 30년 동안 별일이 다 생길 텐데 정부의 재량을 최대한 축소해서 흔들릴 수 없는 체계를 만들어야 그나마 넷제로에 가까운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고민의 결과로 기후위기대응법(‘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안’이라는 이름으로 2021년 8월31일 국회 통과)을 만들었다. 이 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주력한 것은 두 가지다.

①온실가스 감축과 이행이 역진하지 않도록 이행 현황을 매년 점검하고 그 결과 보고서를 작성해 국민에게 공개하도록 한 것(법 제9조)

②정부는 기후위기에 취약한 계층 등의 현황과 일자리 감소, 지역경제의 영향 등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지역 및 산업의 현황을 파악하고 이에 대한 지원 대책과 재난 대비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법 제47조)

①은 사회 전환의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고민의 결과였다면 ②는 이행 과정에서의 부정의를 바로잡기 위한 장치였다. 탄소중립법 원년인 2021년의 국정감사는 통과된 법안이 ‘공동의 차별화된 원칙’에 입각해 기후위기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주체가 책임지는 방향의 구조와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구체적인 방향을 온실가스 다량 배출 기업의 감축 실태부터 점검하기로 했다.

2020년 10월28일 문재인 대통령은 ‘2021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2050 넷제로’를 선언했다. 이를 위해서는 법적 근거가 필요하다. 공동취재사진

2020년 10월28일 문재인 대통령은 ‘2021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2050 넷제로’를 선언했다. 이를 위해서는 법적 근거가 필요하다. 공동취재사진

아직도 먼 기업들의 실상

국정감사를 앞두고 환경부에 ‘반도체·디스플레이·전자산업의 불소가스(F-gas) 사용업체별 온실가스 배출량’(표 참조) 자료를 요구해 실적별로 분석했다. 반도체, 광전지, 디스플레이 업종에 할당된 불소가스의 연간 온실가스 배출량은 500만t인데, 이는 석탄화력발전소 1기(500㎿ 표준)의 연간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1.7배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즉, 감축 설비 도입이 상대적으로 용이한 전기전자 업종에서 불소가스 감축을 시행하면 석탄화력발전소 1.7기를 바로 조기 폐쇄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낸다는 의미다.

이 자료는 국회엔 최초로 제출된 것이라 했다. 제출된 데이터를 쭉 봤더니, 두 업체의 특정 사업장들의 저감률이 유독 낮았다. 저감률이 40%대인 곳도 있고 심지어 19%를 기록한 곳도 있었다.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감축 설비를 가동하면 90% 이상의 저감 효율을 내는데, 이 정도 수치가 나온 건 사실상 거의 저감하지 않고 배출했다는 의미라고 했다. 황당해서 이 업체들이 어딘지 확인해봤더니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 1위 기업이었다. 이들 기업이 대외적으로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이니 재생에너지 확대니 하면서, 기본 중의 기본인 자체적인 저감 설비는 제대로 갖춰놓지 않았던 실상이 밝혀진 것이다. 이 자료를 토대로 해당 기업의 임원을 국정감사 증인으로 출석시켜서 신문했고, 업체는 설비 미흡을 인정하고 설치 확대를 국민 앞에 약속했다. 정부에도 온실가스 감축 시설 점검을 더욱 강화하도록 촉구했다.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서는 마른 수건까지 짜야 하는 판에 이 정도 규모의 온실가스가 저감 없이 배출됐다는 사실은 일회용기 덜 쓰고, 쓴 것도 재활용하며, 전기 아껴 생활하는 시민들의 실천을 맥 빠지게 하는 일이다. 국회와 시민들이 기업과 정부를 계속해서 감시해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압축적인 경제성장’을 한 만큼 ‘압축적인 넷제로’를 해야 할 처지다. 그러려면 지금 당장, 책임 있는 주체에게 더 큰 책임을 부여하고, 피해 본 사람에게 더 두터운 보호를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탄소중립사회로 간다는 건, 코로나19로 더욱 극심해진 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부정의를 치유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공존할 대안이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보라 국회 보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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