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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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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난리보다 무섭다

등록 2022-08-17 11:21 수정 2022-08-18 01:17
1426호 표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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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무섭다고 느낀 첫 기억은 7살 때였다. 그해 여름, 서울에서 엄청난 물난리가 일어났다. 저지대인 풍납동과 성내동 일대가 물에 잠겼다. 성내천이 범람하는 와중에 미처 피하지 못한 주민들은 군용보트를 타거나, 헬기를 타고 구조됐다. 가까운 친척 가족도 그렇게 갑자기 수재민이 됐다. 사촌언니들과 숨바꼭질하면서 놀던, 멀쩡한 집이 흙탕물에 절반 가까이 잠긴 모습을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지켜봤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수재민이 임시로 머물 구호소가 됐다. 학교에 못 가게 된 7살 어린이는 온종일 텔레비전 뉴스만 봤다. 그 장면들은 오래도록 선명했다. 물에 잠긴 마을, 순식간에 집을 잃고 아연한 사람들.

이제는 어린아이도 아닌데, 물이 도시를 집어삼키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2022년 8월8일 저녁, 장대비가 하늘에서 쏟아졌다. 아스팔트를 때리는, 따다닥 따다닥 따발총 소리 같기도 한 빗소리가 무서울 정도였다. 실제 이상기후로 인한 폭우가 누군가의 삶을 집어삼켰다. 그즈음에 서울의 한 반지하 집에서 일가족 세 명이 창문을 통해 들이친 빗물을 피하지 못해 숨졌다. 집 안에서 보면 천장에 붙은, 집 밖에서 보면 아스팔트 땅바닥에 딱 붙은 창문. 누군가의 침입과 시선을 막기 위해, 창문에는 방범용 창살이 달려 있었다. 창문 높이는 30㎝ 남짓. 반지하에 있는 현관문은 수압 탓에 열리지 않고, 작은 창문으로는 탈출할 방법이 없었다. 이웃들이 뜯어내려 애썼지만 창살은 견고했고, 119 구조대는 너무 늦게 도착했다. “누가 부탁하면 항상 손 잡아주는” 면세점 판매노동자이자 노조 상근활동가로 일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홍아무개씨와 그의 13살 딸, 발달장애인 언니는 발 아래부터 차오르는 물 속에서, 아무도 손 잡아주지 못하는 가운데 죽음을 맞았다. 반지하에서 살지 않았다면, 창문이 조금만 더 컸더라면, 방범용 창살이 없었더라면.

안타까운 죽음이 알려진 8월9일 오전, 손고운 기자가 현장에 달려갔다. “선배, 알고 보니 이분들이 기초생활수급자 가정인데 현장에 발달장애인 언니 이름이 적힌 어린이용 사인펜, 곰돌이 지갑, 유기농 쌀… 이런 물건들이 어두컴컴한, 깨진 창문 앞에 널브러진 모습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프네요.”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손고운 기자가 전해오는 이야기에 가슴이 아렸다.

그런데 정작 7살의 눈에 비쳤던 물난리의 현장보다 더 끔찍한 장면은 따로 있었다. “몇 시예요, 사고가 일어난 게?” “(22시쯤이라는 답을 듣고는) 아, 주무시다 그랬구나.” “아니, 어제 엄청난 것이 서초동에 제가 사는 아파트가 전체적으로는 좀 언덕에 있는 아파트인데도 거기가 1층에 물이 들어와가지고 침수될 정도이니.” 홍씨 가족이 숨진 신림동 빌라를 찾아가 윤석열 대통령이 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아연해졌다.

홍씨 가족이 반지하 집에서 죽어가고 있을 때, 대통령이 어디서 무엇을 했기에 그런 말들을 내뱉나. 손 잡아주지 못한 것을 미안해하고, 시스템 붕괴로 구하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게 최소한의 도리 아닌가. 재난으로 서울 곳곳이 아수라장이 된 그 시간, 용산 대통령 집무실에서 퇴근해 서초동의 아파트에서 편안하게 전화로 업무지시를 내린 대통령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애초 준비했던 이번호 표지이야기는 서둘러 추진한 대통령실 이전과 청와대 활용 계획이 왜 문제인지에 대한 기사였다. 갑작스러운 재난은 이런 민낯을 더 고스란히 보여줬다. 대통령은 국가위기관리센터로 가는 대신 자신의 집에 머물렀다. 그래서 이례적으로 표지이야기를 1부와 2부로 나눠, 윤석열 대통령 앞에 놓인 ‘재난’과 ‘공간’이라는 두 문제를 모두 다뤘다.

황예랑 편집장 yrcomm@hani.co.kr

*통권7호(제1424·1425호) ‘비건 비긴’의 ‘만리재에서’에 편집장 이름이 정은주 전 편집장으로 잘못 나갔습니다. 통권호라 평소 잡지와 달리 디자인 포맷을 변경하면서 벌어진 실수였습니다. 마지막까지 꼼꼼하게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한 마음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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