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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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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는 말

등록 2022-02-15 14:12 수정 2022-02-16 01:59
1400호 표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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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억하는 첫 대통령선거는 1987년이다. 군부독재, 민주화운동, 직선제가 뭔지 몰랐던 아홉 살은 그저 귀에 콕콕 박히는 몇몇 선거 구호가 전부인 줄로만 알았다. ‘보통사람’ ‘이 사람 믿어주세요’.

‘땡전뉴스’의 점화(프라이밍) 전략에 말려들어, 나도 모르게 기호 1번에 마음을 줬다는 사실을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다행히 아홉 살에게는 투표권이 없었다. 다른 후보에게 투표했던 부모님이 그날 밤 개표 방송을 보면서 왜 씁쓸한 표정이었는지도 뒤늦게야 알았다. 기호 1번 노태우 후보는 36.6%의 역대 최저 득표율로 대통령이 됐다. 그 뒤 여섯 번의 대선을 지켜봤지만(그중 네 번은 투표권도 있었지만), 아홉 살 이후로는 머릿속에 각인될 만큼 강렬한 선거 구호를 마주치지 못했다.

2022년 대통령선거는 최악의 대선으로 기억될 것이다. 매일같이 더 큰 당혹감이, 그 전날의 당혹감을 덮는다. ‘허위 이력 논란’으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부인 김건희씨가 사과(2021년 12월26일)하던 잔상이 사라지기도 전에, 이번에는 ‘과잉 의전 논란’으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부인 김혜경씨가 사과했다(2022년 2월9일). 윤석열 후보가 문재인 정부의 ‘적폐 수사’ 운운(2월9일)하더니, 다음날 문재인 대통령이 “강력한 분노”를 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반대를 위한 반대, 혐오를 부추기는 적대만 뒤덮인 선거다. 대선이 한 달도 남지 않았는데, 제대로 된 비전이나 정책은커녕 그럴듯한 선언이나 선거 구호도 찾아보기 어렵다. 역대 대선에서는 그래도 후보들끼리 시대정신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하긴 했다. 2007년 이명박의 ‘선진화’ ‘성공’, 2012년 박근혜의 ‘경제민주화’ ‘복지국가’, 2017년 문재인의 ‘적폐 청산’ ‘나라다운 나라’. 후보 시절에 했던 달콤한 약속이 대통령 집권기의 성과로까지 이어지지 못했을지언정, 적어도 대선 후보 시절에 한국 사회를 어디로, 어떻게 끌고 가려는 건지 논의하고 토론했다. 그게 대선이었다.

몇 달간 대통령의 ‘말과 글’만 들여다봤던 시절이 있었다. 1998~2015년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 18년 동안 ‘대통령의 말’(연설문 등 총 2597건)과 이를 기록한 ‘언론의 글’(종합일간지 6곳의 사설 8만3316건)을 심층 분석했다. 그 결과를 2016년 1월 제1096호와 제1097호 표지이야기로 썼다. 그때 알았다. 대통령의 정치는 권력이 아니라, 말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뉴욕타임스> 등이 미국 역대 대통령의 연설문을 주석까지 달아가며 수십 년에 걸쳐 심층 분석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는 그렇게 분석할 ‘말’이 보이지 않는다. 기억에 남는 후보들의 말이라곤 ‘여성가족부 폐지’ ‘병사 월급 200만원’ 등 성별과 세대를 갈라치기 하는, 이대남을 향한 구애의 말뿐이다.

2월15일부터 시작되는 22일간의 제20대 대선 공식 선거운동을 앞두고, 역대 어느 대선보다 안갯속에 놓인 초박빙 구도에서 앞으로 판세를 좌우할 3가지 관전 요소를 김규남, 이정규 기자가 짚어봤다. 엄지원 기자는 ‘이대남 현상’이 불편하다고 말하는 20대 남성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번에 발간된 <한겨레21>은 제1400호다. 구둘래 기자가 특집 기사 ‘요즘, 잡지’에서 썼듯이 “시사잡지의 새로운 뉴스는 다음 뉴스가 덮을 것”이지만 “사람의 눈을 디지털에 빼앗긴 세상에서 종이잡지는 버티고” 있다. 종이잡지가 수없이 사라지고 수없이 생겨나는 가운데서도 1400번이나 종이잡지를 펴내고 이렇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독자 여러분 덕분이다. 그것 하나만은 앞으로도 꼭 기억해두려고 한다.

황예랑 편집장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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