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벨기에 브뤼셀에 3개월간 머물며 유럽연합·유럽의회를 취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유럽저널리즘센터(EJC)에서 초청했는데 한국 기자를 돌봐준 사람은 프리랜서 기자 마리아 라우라 프란초시였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69살. 이탈리아 뉴스통신사 기자로 브뤼셀에서만 20년 가까이 취재해온 베테랑 기자였습니다. 기사를 쓰려고 뛰듯이 빠른 걸음으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그를 쫓아다니며 ‘나이 듦’과 ‘늙음’은 다르다는 걸 배웠습니다.
이번호 표지이야기 ‘할머니가 좋아’를 기획하며 마리아 라우라 프란초시를 떠올렸습니다. 글로벌 셀럽이 된 박막례 할머니나 ‘엘레강스’의 대명사가 된 밀라논나, 아카데미 시상식장을 들었다 놨다 하는 윤여정 배우뿐만 아니라, 우리 곁에도 아주 멋진 할머니가 많습니다. 우리는 다정하고 과감한, “어느 날 내 모습이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할머니 세 분을 만났습니다.
윤명숙(71)씨는 30대부터 울트라마라톤(42.195㎞ 풀코스 마라톤보다 긴 거리의 마라톤)과 산악달리기를 즐겼습니다. 매일 새벽 4시께 일어나 관악산을 가볍게 뛰어오르고, 격일로 수영과 12㎞ 달리기를 합니다. 한 달에 서너 번은 마라톤이나 수영 대회를 나가는, 그의 방에는 메달과 상패가 빼곡하게 전시돼 있습니다. 아무리 살림이 어렵고 일이 바빠도 그는 아침 운동 시간만은 양보하지 않습니다. 운동하면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머리가 맑아지고” “하고 싶은 게 계속 튀어나”온답니다.
30여 편의 영화를 찍은 박은희(66)씨는 50대 때 처음 영상편집을 만났습니다. “집 컴퓨터에 프리미어를 까는 방법을 몰라서 선생님에게 물어봤을 정도”로 초보였는데, “눈뜨면 컴퓨터를 켜고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도 잊고 빠져들어” 어느새 공모전·영화제 수상작을 7편이나 내놓은 다큐멘터리 감독이 됐습니다. “100살까지 살 수밖에 없”는 요즘, 언제든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충분히 시작할 수 있는 나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70살이라도 30년을 더 살아야 하니까요.
1975년 자녀의 성을 자신의 성으로 바꾼 임봉근(90)씨도 있습니다. 지금도 혼인신고서를 내며 자녀의 성을 엄마의 성으로 쓰겠다고 하면, 구청 직원이 “한번 이렇게 하시면 못 바꾸는 거 아시죠?”라는 잔소리를 하는데, 46년 전에 그 일을 해내다니 놀랍기만 합니다. 2021년 6월 손녀 임다운씨가 할머니 이야기를 스탠드업 코미디 극단 ‘동북아국제구술문화연구회’ 발표회 무대에 소개하면서 알려졌습니다. “우리 손녀가 아주 망신을 주려고 작정했나보다”라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지만 바람난 남편과 “이혼하고 성도 바꿨”던 사연을 술술 풀어냅니다. “자녀 성을 바꾸고 나니” 달 색깔이 밝아지고 식사 때 “소화가 잘되고 쑥쑥 내려”가더랍니다. “그동안은 내가 아니었던 거죠. 그때부터 나답게 살자,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나가는 할머니 이야기를 읽으며 절로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지금은 헤매며 좌충우돌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며 나답게 살면 나도 “꼰대가 아닌 아주 멋진 할머니”(옥희살롱 연구활동가 김영옥씨)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게 됐습니다. ‘야무지고 당찬’ 꿈, 저도 꿔봅니다.
정은주 편집장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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