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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재에서] 그의 고통을 떠올리며

등록 2021-01-31 01:11 수정 2021-02-02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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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로 만든 팔각상을 갖고 있습니다. 손님 오는 일이 없는 단출한 식구라 한 번도 써보지 않았지만 버릴 생각은 못했습니다. 그 팔각상에 한지를 한장 한장 붙이며 딸의 고통을 새긴 그를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2014년 9월 아빠는 고려대 대학원생인 딸 수지(가명)씨가 지도교수로부터 3개월간 성희롱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습니다. 지도교수는 수시로 영상전화를 걸어오고 아침저녁으로 사진을 보내라고 요구했습니다. 때로는 포옹도 하고, 학교 지하주차장에서 강제로 키스했습니다. 당시 지도교수는 54살, 수지씨는 23살이었습니다.

아빠는 “내 인생을 걸고 법적 조처와 함께 공론화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렇게 싸움은 시작됐습니다. 지도교수는 처음에 성추행을 전면 부인했고, 수지씨는 몸을 떨며 “답답하다”고 가슴을 쳐댔습니다. 수사기관에서는 ‘강제가 아니었다’ ‘연애했다’고 말을 바꾸었고, 수지씨는 다시 ‘무슨 소리냐’며 실신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런 딸을 바라보며 아빠는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딸이 너무 원통해하고 분해하니까, 이 싸움을 하지만 두렵다. 아이를 살리려고 한 일이 아이를 잡는 게 아닌지….” 그 왔다 갔다 하는 마음을 다스리려고 아빠는 한지 팔각상을 직접 만들어 딸의 사건을 돕는 이들에게 선물했습니다. 1년여 재판 끝에 2016년 7월 지도교수는 1심에서 징역 1년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2021년 1월25일 국가인권위원회의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 사건 직권조사 결과 발표를 보며 6년 전 선물받은 한지 팔각상을 떠올렸습니다. 인권위에서 성추행에 해당한다는 인정을 받기 위해, 피해자와 그 가족이 겪었을 고통이 그때와 다르지 않았을 테니까요. “피해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엄마 내가 죽으면 인정할까?’라는 말을 한다. (중략) 가슴이 답답하고 터져버릴 것 같아 대성통곡이라도 하고 싶지만, 나는 우리 딸 앞에서 절대로 내색하지 못했다. 내가 힘들다고 하면 같이 죽자고 하기 때문이다.”(박 전 시장의 성추행 피해자 어머니가 1월18일 발표한 입장문)

박 전 시장이 방어권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이란 점을 들어 인권위는 일반적 성희롱 사건보다 사실관계를 엄격하게 따졌습니다. 성추행 행위가 일어났을 때 피해자가 그 사실을 말했다는 참고인 진술이 없거나 휴대전화 메시지 등 입증 자료가 없을 때는 사실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보좌하는 비서가 서울시장의 성희롱 발언을 누군가에게 말하기 쉽지 않은데다, 대화가 자동 삭제되는 텔레그램 비밀대화방에서 주로 이뤄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피해자 주장 대부분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도 인권위는 “박 시장이 늦은 밤 시간 피해자에게 부적절한 메시지와 사진·이모티콘을 보내고 집무실에서 네일아트 한 손톱과 손을 만졌다는 피해자의 주장은 사실로 인정 가능하다”며 “박 시장의 행위는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성적 언동으로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박 전 시장의 성추행 행위만큼이나 암담한 것은 그 행위를 피해자에게 전해 들은 서울시 관계자들의 당시 반응입니다. 그들은 박 전 시장과 피해자를 ‘각별한 사이’나 ‘친밀한 관계’라고만 봤습니다. 성희롱의 속성이나 위계 구조를 인식하지 못하는 낮은 성인지 감수성 탓에 박 전 시장의 행위를 ‘문제’라고 바라보지 못했다는 게 인권위의 설명입니다. 그래서 성희롱 행위를 알고도 침묵하거나 이를 용이하도록 도와주려 한 ‘묵인·방조범’조차 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권력형 성범죄가 일어나도, 그것이 범죄 행위인지도 인지하지 못하는 조직문화에서 4년을 보내고, ‘피해 호소인’에서 ‘피해자’로 인정받기까지 또다시 6개월을 견뎌낸 피해자를 떠올리니 마음이 아픕니다. 이제라도 서울시가 인권위가 권고한 성역할 고정관념에 따른 비서실 업무 관행 개선, 성희롱·성폭력 예방과 구제 제도 개선 등을 이행하길 바랍니다. 무엇보다 피해자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시 온전하게 자신의 삶을 회복할 수 있도록 아낌없는 지지와 성원”을 보냅니다.

정은주 편집장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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