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황티브잡스의 민부론

편집장의 편지
등록 2019-10-01 03:13 수정 2020-05-03 04:29

디지털 문맹이지만, 휴대전화 역사는 아이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것쯤은 안다. 스티브 잡스는 휴대전화 역사만이 아니라 세상을 바꿨는지 모른다. 아이폰 출시를 알린 2007년 1월9일 잡스의 프레젠테이션은 다시 봐도 역사에 남을 만한 명장면이다. 늘 그렇듯 검정 터틀넥에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은 그는 “우리는 이 새로운 제품을 아이폰이라 부른다. 오늘 애플이 휴대전화를 재발명할 것이다”고 말했다.

9월22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 그가 재현했다는 기사가 떴다. 이날만큼은 ‘황티브잡스’로 불린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2020 경제대전환’을 알리겠다며, 늘 입던 검정 양복을 벗고 일주일 전 삭발한 뒤 짧게 자란 머리에 캐주얼 차림으로 무대에 섰다. 그는 “‘규제와 추락의 절망경제’에서 ‘자유와 창의의 희망경제’로의 대전환”을 선언했다. 옷차림새와 손짓을 빼면 잡스와 비슷한 구석이라곤 없는 그가 응급상태에 빠진 한국 경제를 구하겠다면서 들고나온 ‘민부론’은 창의와 대전환과는 어울리지 않는 짝퉁이었다.

이름부터 가짜 논란을 불렀다. 민부론은 1776년 초판이 나온 애덤 스미스의 에서 따왔다. 스미스의 책은 경제사에서 큰 영향력을 지녔다. ‘경제학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그를 보수 경제학자들은 우상으로 섬긴다. 스미스에게서 오직 개인과 기업의 합리적 선택, 시장의 자율성만을 추출해 신봉한다. 문재인 정부가 “철 지난 좌파 이념에 매달린 반시장·반기업 정책”을 편다고 보는 황교안 당대표를 비롯한 자유한국당은, 스미스의 책 제목을 모방해 나름 대안을 담았다. 황티브잡스의 프레젠테이션 다음날 사단법인 민부정책연구원 이사장을 맡은 김두관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민부론을 도용당했다고 주장했다. 민부론은 자신이 2006년부터 줄곧 주창해온 이론이라고 한다. 이름은 같으나, 두 민부론의 내용은 전혀 다르다.

곳곳에 사실 왜곡과 과장이 깃들어 있지만 민부론엔 나름 새 개념도 살짝 담겼다. 황 대표는 “문재인 정권의 소득주도성장론은 시대를 거스르는 실패한 정책이다. …이제는 유수 정책이 필요하다. 지능 자본이 사방으로 흘러넘치는 유수 경제, 협력 공유, 개방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한민국을 전환하겠다”고 말한다. 수출 대기업 중심의 경제성장 과실이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듯 내수와 중소기업, 가계로 스며든다는 이른바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 대신 ‘유수’란 말을 쓴 것이다. 하지만 유수란 말만 새롭지 내용은 친기업, 반노동, 감세, 규제완화, 복지 축소, 긴축재정 등 이전 보수 정부에서 추진해온 ‘낙수 정책’ 그대로다. 민부론에 깃든 유수 정책은 다름아닌 낙수 정책의 짝퉁이다.

숫자로 표현되는 민부론의 목표도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복사판이다. 이명박 정부의 ‘747’(경제성장률 7%, 1인당 소득 4만달러, 세계 7대 경제대국)이나 박근혜 정부의 ‘474’(경제성장률 4%, 고용률 70%, 1인당 소득 4만달러)가 되풀이된다. 황 대표가 발표한 민부론은 10년 내 1인당 소득 5만달러, 가구당 연소득 1억원, 중산층 비율 70%를 목표로 한다. 가칭 ‘517’ 정책이라 할 만하다. 숫자는 기대치를 높이지만, 현실에선 성장에만 치우쳐 분배나 다른 정책적 가치를 뒤로 미룬다. 자원 배분만 왜곡한 채 실패로 끝나기 쉽다.

야당이 짝퉁이나마 정책 비전을 내놓은 건 분명 바람직하다. 아쉬운 건 ‘대전환’을 내세우지만, 3년 전으로의 회귀다. 40분 넘는 황 대표의 프레젠테이션에서 지난 10년 집권세력으로서 자기반성과 성찰은 찾아볼 수 없다.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은 모두 부정되고, 그게 이유가 되어 ‘과거로의 회귀’가 미래로 포장돼 정당화된다. 프레젠테이션 뒤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하는 과정에서 황 대표는 겸손을 띤 채 “공부를 많이 하지는 못했다”고 말했는데, 실제 2년 치만 공부한 것 같다. 그전 과거 10년 치를 제대로 공부했다면 민부론이 이명박·박근혜 정부 경제정책의 복사본이란 걸 알아차렸을 게다.

류이근 편집장 ryuyigeun@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