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연도를 알 수 없으나, ‘라커룸’이란 말은 1870년대부터 썼다는 기록이 있다. 체육관이나 공장, 학교 등에서 옷을 갈아입거나 개인 물품을 보관하는 라커가 딸린 공간을 뜻한다. 폐쇄된 이곳에서 주고받는 남성들의 은밀한 성적 농담을 ‘라커룸 토크’(locker room talk)라 하는데, 1980년대 들어서 갖게 된 뜻이다. 애초 골프 관련 수다와 소문을 가리키던 말이었다.
라커룸 토크를 유행시킨 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3년 전 미국 대선 때 트럼프가, 2005년에 방송인 빌리 부시와 주고받은 말이 공개되면서다. 결혼한 여성을 유혹하려 했다거나 여성의 신체 부위를 움켜쥐었다는 것을 떠벌리는 육성이 드러났지만, 그는 라커룸 토크, 즉 성적 농담이었을 뿐이라고 둘러댔다.
라커룸은 한국에서도 화제다. 쇼트트랙 심석희 선수가 조재범 전 국가대표팀 코치한테 폭행뿐만 아니라 성폭행까지 당한 사실이 드러나자, 최근 한국체육대 학부모가 띄운 것으로 추정되는 글 하나가 빠르게 번졌다. “아니 빙상장, 락카서 우찌 성폭행을 하나요 그럴 장소와 그럴 사람이라 믿나요?” 엉터리 ‘믿음’이라고 넘기기엔 뒷맛이 개운치 않다. 누구나 짐작하듯 라커룸은 절대 성폭력 안전지대가 아니다. 지난해 10월 미국 메릴랜드주 더매스커스 고교 라커룸에서는 2~3학년 남학생 다섯이 2군 풋볼팀에 속한 1학년 넷을 성폭행했다. 충격에 미국 전역이 들썩했다. 같은 달 역시 미국 버지니아주 투스카로라 고교 라커룸에서도 학생 셋이 하급생 1명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됐다.
사례는 차고 넘친다. 문제의 글에 더욱 거슬리는 표현이 있다. “심석희 황제훈련 받은 거 아닙니까… 조쌤이 타 선수들 부러울 정도로 심석희만 애지중지 훈련 신경 쓰지 않았나요… 우찌 링크장·락카서 성폭행을 당했다 하니 화가 많이 나네여.” ‘황제훈련’ 정의와 기준이 뭔지 모르겠지만, 설령 심석희가 ‘황제훈련’이란 걸 받았다 치더라도 그가 성폭행을 당했다는 주장과 무슨 상관인가. 이 글이 노리는 건 명확하다. 심석희의 ‘피해자다움’에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다움’은 ‘답다’의 명사형인데, 답다는 어떤 성질이나 특성이 있다고 할 때 쓴다. 피해자다움은 약자, 가난, 연민, 동정을 떠오르게 한다. 권력을 연상시키는 황제란 단어와 피해자다움은 짝이 맞지 않다. 그래서 황제훈련으로 피해자가 입은 피해는 희석되고 의심된다.
서지현 검사가 지난해 1월 JTBC 에 출연해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한테 성추행당한 사실을 세상에 알린 뒤 어느 기자가 물었다. “방송 출연 때 샤넬을 입었다면서요?” 그는 상표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샤넬 아닌데요. 레노마인데요.” 그가 사치를 하는지 안 하는지 모르지만, 어떤 상표의 옷을 입느냐와 피해 사실이 무슨 상관인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1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성폭행당한 다음날 안 전 지사가 좋아하는 순두부 식당을 찾고 저녁때는 와인바에 함께 간 사실을 문제 삼았다. 이를 피해자답지 못한 행동으로 보고 무죄의 증거로 삼았다.
가해자를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비슷한 프레임(틀)이 작동한다. ‘땅콩 회항’으로 온 국민의 공분을 산 대한항공의 조현아 전 부사장은 포토라인에 섰을 때 흘겨보는 눈빛으로 더 뭇매를 맞았다. 지난해 10월 한국유치원총연합회(한유총) 전북지회장이 국회에 나왔을 때는 옷이 문제였다. 가수 지드래곤이 즐겨 입었다는 수십만원짜리 명품 셔츠를 입었다는 의심은 한유총에 대한 비난과 조롱을 배가했다. 비싼 옷을 입거나 고개를 들거나 눈을 치켜뜨거나 무릎을 꿇지 않으면 가해자에게 더 많은 돌이 쏟아진다. 그 반대면 인정과 관대함이 작동한다.
가해 사실이 가해자의 태도에 따라서, 피해 사실이 피해자다움에 따라서 흔들리거나 왜곡된다. 누군가는 그걸 노리고 이용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그 프레임에서 자유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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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8일 한겨레 그림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