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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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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힘이 된다

편집장의 편지
등록 2018-12-22 13:04 수정 2020-05-03 04:29

지구가 큰 원을 그리며 태양을 한 바퀴 돌았다. 1년, 52주, 365일이 흘렀다. 동서고금 저마다 그 의미를 찾는 방식이 다를 텐데, (21)은 표지를 되짚어봤다.

기자란 뭘까. 기록하는 사람들, 혹자는 묻는 사람이라고 한다. 묻지 않고 기록할 수 없고 기록하지 않는데 물을 필요 없으니, 묻고 기록하는 자들로 정의될 수도 있다. 기자들은 지난 1년, 50권(설과 추석은 합본호)의 잡지에서 무엇을 묻고 기록했을까.

수년 전 신문에서 일할 때다. 신문을 펼쳐 제목만 훑어봤다. 부정적 뉘앙스가 태반이었다. 책상에 널브러진 다른 신문들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그렇지 않은데 기자들이 너무 삐딱하게 보고 부정적으로 쓰는 건 아닌지 자문했다. 빤한 제목들이 눈에 거슬렸지만, 분명한 건 고장 난 세상을 담은 팩트들이었다.

“작년엔 만삼천여 명이 교통사고로 죽고/ 이천이삼백여 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죽고/ 천이백여 명의 농민이 농약 뿌리다 죽고/ 또 몇백 명의 당신네 아이들이 공부, 공부에 치여 스스로 목숨을 끊고/ 죽고, 죽고, 죽고…지금도 계속 죽어가고…/ 압구정동에는 화사한 꽃이 피고/ 저 죽은 이들의 얼굴로 꽃이 피고/ 그 꽃을 따먹는 사람들, 입술 붉은 사람들/ 아, 사람들…”

1993년 발표된 정태춘 박은옥의 음반 《92년 장마, 종로에서》에 수록된 의 노랫말이다. 현실은 더하겠지.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 우울하면서도 경쾌한 박자의 노래를 따라 부를 때마다 언뜻 드는 생각이다.

2018년 표지들을 더듬으며 새삼 놀랐다. 예외가 꽤 있지만 죽은, 아픈, 슬픈 서사를 띤 사람들의 얘기가 많아서다. ‘살아남은 게 죄입니까’(제1221호), ‘자해러의 고백-나 살고 싶어요’(제1237호), ‘그랬구나 힘들었구나’(제1238호),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제1223호), ‘누가 폭염으로 숨지는가’(제1224호), ‘304개 별들의 꿈’(제1207호), ‘아이가 죽어야 인정되는 산재’(제1206호), ‘KAL의 황유미’(제1216호), ‘목숨 걸고 지하철 타는 사람들’(제1227호), ‘1968 꽝남대학살’(제1196호), ‘死·삶 4·3을 말한다’(제1204호), ‘슬픈 돼지의 경고’(제1230호), ‘난임이 찍은 낙인’(제1213호), ‘벤조피렌 마시는 아이들’(제1197호) …. ‘#미투’, 난민 등 다 셈하기 벅차다.

이 현실을 어둡게 조명해 불편한 이야기를 골라 쓰는 걸까. 은 매주 잡지를 낸 뒤 신문에 광고를 낼 때 ‘진실과 정의의 창 ’이란 문구를 쓴다. 기자들이 2018년 이 창으로 묻고 기록한 세상은 아직도 너무 아프고 슬프다. 심지어 피지 못한 청춘이 죽어야 할 만큼 부조리하다. 기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상을 탔는데 그 가운데 천안함, 난민, #미투, 폭염을 다룬 기사들은 모양새가 다 다르지만 아픔과 거기서 배어난 슬픔이 깃들어 있다. 우리 사회가 그들을 아프게 했거나, 아픈 우리 사회의 모습이 그들을 통해 드러났다.

엊그제 회사 맞은편에 있는 식당 해피포차에서 저녁을 먹는데 마주 앉은 선배가 막걸리를 들이켜다 한마디 뱉는다. “슬픔은 힘이야.” 19년 동안 “팩트가 힘이다”라는 말만 들어온 기자에게, 슬픔을 불러일으킨 기사가 힘을 갖는다는 낯선 말은 가슴에 확 꽂혔다. 얼큰하게 취한 그가 말을 더 보태지 못한 게 아쉽지만, 이 지난 1년간 만든 표지들이 또 2019년에도 쓸 기사들이 슬픔을 담아낼 수 있길 바란다.

류이근 편집장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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