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자금법 관련 사건들을 짚고, 한국 정치 구조상 죄짓지 않고 정치하기 어려운 상황을 깊이 있게 다루자.”(꿈뚱뚱이)
“정치인은 어떤 경우에 괴테의 파우스트처럼 악마와 거래하는가. 우리가 감시할 수 있는 루트는 현재 없는가. 기본적인 정치와 자금의 생태에 대해 다뤄야 한다.”(꿈꾸는당나귀)
누구의 ‘발제’일까. 7월23일 서거한 고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서거를 어떻게 보도할 것인지 논의하는 편집회의에서 () 기자들이 내놓은 발제일까. 아니다. 독자들의 발제다. 꿈뚱뚱이, 꿈꾸는당나귀는 의 정기독자 참여 플랫폼, ‘독편 3.0’(독자편집위원회 3.0)에 참여하고 있는 ‘독편’(독자편집위원)들이다.
독편들의 발제고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서거를 표지이야기로 다룬 제1223호 제작에는 이전에는 없던 ‘특별한’ 구성원, 독편의 참여가 있었다. 노회찬 의원이 서거한 7월23일은 공교롭게 독편 3.0이 출범한 날이기도 했다. 이날 저녁 ‘카카오톡’에 ‘독편 카톡방’이 개설됐다. 독편으로 등록한 200여 명 가운데 카톡방 참여와 별도 소모임 카톡방을 꾸리겠다고 선택한 70여 명의 독편이 초대됐다. 이번에 구성된 독편 3.0은 참여 문턱을 최대한 낮춘 개방형 플랫폼으로 ‘정기독자 전용폰’(010-7510-2154)과 ‘독편 카톡방’을 중심으로 운영된다. 지난호에선 전용폰 문자로 독자 150여 명이 참여한 지면 개편 설문조사 결과(제1223호, “독자의 힘으로 만드는 ‘21’”)를 소개했다. 이번엔 ‘독편 카톡방’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뉴스 경험’ 이야기를 전한다.
노회찬 의원의 비보가 전해진 다음날인 7월24일 오후 팀장회의에서 표지이야기를 교체하기로 결정한 류이근 편집장은 곧바로 ‘독편 카톡방’을 찾았다. “오늘 처음 인사드렸는데, 낯가림 없이 바로 독편님들께 의견을 구하고 싶다. 하룻새 의 표지가 바뀌었다. 노회찬 의원의 서거를 다음주 표지로 다루기로 조금 전 결정했다. 어떤 기사들로 구성하면 좋을지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다.” 오후 3시께부터 저녁 7시까지 4시간여 동안 쏟아진 독편들의 ‘아이템 발제’를 들은 류 편집장은 여러 독편이 제안한 ‘현행 정치자금법의 한계’를 짚는 기사를 지면에 추가하기로 결정했다. 류 편집장은 폭염에 대한 사회경제적 접근을 시도하는 제1224호 표지이야기도 독편과 ‘카톡방 편집회의’를 열었고, 여기서 쏟아진 독편들의 의견을 기자들과의 텔레그램방에 그대로 공유했다.
기자들의 ‘텔레그램방’도 독자들의 ‘카톡방’으로 확장됐다. 노회찬 의원의 국회 영결식에서 김영숙 국회 환경노동조합 위원장이 이정미 정의당 대표 품에 안겨 눈물을 쏟는 동영상은 기자들의 메신저 방에 올라온 뒤 곧바로 독편 카톡방에 공유됐다. 이 동영상을 물려 쓴 현장 기사가 인터넷한겨레에 오르고, 포털사이트를 통해 대중에게 전파되기 전에 일어난 일들이다. 기자들이 전유하던 뉴스 보도 이전의 과정을 공유하는 새로운 존재가 독편이다.
진성독자를 만드는 경험같은 날 밤 10시께 의 디자인을 맡은 디자인주 사무실에서 열린 표지 선정 회의 직후엔 표지 후보 셋이 독편 카톡방에 똑같이 올랐다. “다음 셋 중 어느 게 표지로 좋을까요?” 고 노회찬 전 의원이 첼로를 켜는 표지가 독편 다수의 지지를 받았고, 첼로 표지가 실제 표지로 채택돼 제1223호가 발행되었다. 표지 소장을 원하는 독편에게는 표지 PDF 파일도 제공됐다.
“결과보다는 과정이 새롭다. 다수의 참여에 따른 기사 편집, 앞으로가 더 기대됩니다. 어떻게 진화해갈지.”(최영식)
“잡지 편집 과정에 참여하는 경험 자체가 편집장님께서 말씀하신 ‘진성독자’를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앞으로 더 기대된다.”(황준서)
“ 받고 뿌듯했다. 이런 경험 처음이다.”(클라라파파)
2013년 한겨레신문 창간 25주년을 맞아 작성한 ‘한겨레 25년, 창간정신의 진화-말 거는 한겨레’ 보고서는 미래의 한겨레가 지향해야 할 가치로 ‘개방, 공유, 협력’이라는 열쇳말을 제시하면서, 한국의 언론이 마주한 현실을 이렇게 진단했다. “기자가 아는 것은 제한되고 혼자 다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대중의 지식, 뛰어난 전문가의 역량을 엮어서 취재를 해야 한다. 시민들이 일상에서 얻고 경험하는 정보를 공유하고 제공토록 하는 ‘집단협업(crowdsourcing) 저널리즘’이나 ‘오픈 저널리즘’을 능숙히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시 해당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류 편집장은 5년 뒤인 2018년 의 편집장이 됐다. 독편 3.0은 개방·공유·협력이라는 미래 한겨레의 가치가 구현되는 공간이다. 는 독자와 소통을 강화하는 매체들의 실험을 다룬 기사(7월17일 “벽을 허물었다, 독자가 다가왔다”)에서 유튜브를 통한 시청자의 뉴스 참여를 시도하는 MBC의 ‘마이 리틀 뉴스데스크’와 의 ‘독편 3.0’을 소개했다.
내 뒤에 이 있다한국을 넘어 세계 저널리즘의 경향을 고려할 때 독편 3.0은 때늦은 시도다. 영국의 진보적 일간지 이 매일 오전 편집회의에서 결정된 기사 출고 계획을 독자에게 공개(오픈 뉴스리스트)한 것이 2010년의 일이다. 전세계 언론인이 모이는 가장 큰 행사인 세계편집인포럼이 언론사의 생존 모델로 ‘뉴스 유료화’와 ‘수용자 참여’를 화두로 삼은 때는 2013년이다. 당시 미국 뉴욕시립대 저널리즘스쿨의 제프 자비스 교수는 핵심 시장 안에 있는 독자들이 밖에 있는 독자들보다 25배나 중요하지만, 불행하게도 많은 언론사가 독자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독자들이 어디에 살고, 무슨 일을 하는지와 같은 작은 데이터로 독자들과 관계 맺기를 시작하라.… 우리는 관계 비즈니스 안에 있어야 한다.”(한국언론진흥재단, , 2013)
독편 3.0은 시도보다 중요한 진화가 남아 있다. 은 편집회의 공개 이후 2012년 독자와 소통하고 독자의 참여를 매체 전략의 핵심으로 삼는 ‘오픈 저널리즘’을 자사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2015년과 2016년엔 미국에서 경찰에 의해 사망한 민간인의 정보를 집약하는 데이터베이스 크라우드소싱 프로젝트 ‘더 카운티드’를 시작하면서 “수용자가 우리가 추구하는 저널리즘의 핵심이다”고 선언했다.
8월3일 독편 카톡방에 기사에 대한 피드백을 남긴 권성철 독편과 나눈 카톡 대화에 진화의 실마리가 있다. “참여하면서 ‘나도 영향력이 있구나’ 느꼈다. 특히 표지 디자인 결정이 그랬다. 생활 중에 부조리를 개선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이전보다 커졌다. 내 뒤에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 있다고 생각하니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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