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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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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등록 2018-05-01 16:31 수정 2020-05-03 04:28

“손수레 가져오렴.”

“네. 2.5t 포터 끌고 갑니다.”

“점오(0.5) 빼도 돼. 2권이니 2t이면 너끈해.”

막상 회사 후배는 평소 타던 낡은 아반떼를 몰고 나타났다. 장난삼아 0을 두 개 빼고서 문자메시지를 보냈는데, 진짜로 여겼나보다. 200권이 훌쩍 넘는 책을 트렁크와 뒷자리, 조수석에 욱여넣었다. 공짜 책을 얻은 후배는 미얀마에서 사왔다는 허접한 천으로 짠 가방 하나를 내밀었다. 그래도 미안했던지 장모님 드리려고 챙겨온 색깔만 다른 가방마저 건넸다. 부담 갖지 않게 하고 싶어서 맘에 없는 말을 했다. “나한텐 쓰레기야.” 속마음은 빈 책장만큼이나 허한데….

지난 1월6일 치른 의식은 오랜 꿈과의 완전한 작별이었다. 18년 만이다.

첫 남북 정상회담이 있던 2000년 가을 입사지원서를 낼 때부터 장래 희망은 한반도 전문기자였다. 대학 친구 정욱식 한반도평화네트워크 대표의 영향이 컸다. 분단의 모순에 정면으로 응전한 그의 열정과 뚝심이 부러웠다. 그해 운 좋게 기자가 된 뒤 한두 권씩 북한 관련 책을 모으면서 꿈도 영글었다. 신문에 있다가 에 와서는 3년 동안(2005~2007년) 북한 관련 기사도 제법 썼다. 선배 정인환 기자가 사수였다.

욕심에 북한대학원대학교에도 입학했다. 정작 이명박의 BBK를 쫓느라 출석은 어쩌다 한번이었지만 지적 충전에 흡족했다. 2차 남북 정상회담도 열렸다. 세상이 들썩거렸다. 그해 회사에 ‘김정일 연구모임’이란 것도 만들었다. 김정은이란 이름을 처음 들은 것도 그즈음이었다.

제17대 대선에서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몇 달 만에 세상이 달라졌다. 남북관계는 급랭했다. 한파에 사내 연구모임은 흐지부지됐다. 논문을 쓰지 않아 대학원도 졸업하지 못했다. 도통 맘이 가지 않았다. 유행처럼 세워졌던 북한대학원도 하나둘 문을 닫았다. 시들해진 학문에 학생 수는 급감했다.

그때부터였다. 서재에 북한 관련 책이 더는 늘지 않았다. 책에 손이 가지 않았다.

금강산 관광 중단을 시작으로 천안함 침몰, 연평도 포격 등이 잇따르면서 남북의 대화는 끊겼다. 박근혜 정부에서 어둠은 더 짙어졌다. 마지막 통로였던 개성공단마저 폐쇄됐다.

꿈은 아득해졌다. 그 10년, 얼마나 많은 이가 북한 전문가의 꿈을 접었을까. 나에겐 다행히 첫사랑이 식으니, 새 사랑이 싹텄다. 어느덧 내 관심은 경제와 탐사보도 쪽으로 옮겨갔다.

그새 북쪽에선 김정일이 죽고 김정은이 형을 제치고 후계자가 됐다. 남쪽에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다. 지난해 한반도 전쟁지수는 속절없이 치솟았다.

후배에게 책을 넘겨줄 때쯤에야 김정은과 트럼프의 치킨게임은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문재인 정부의 노력과 중재 아래 한반도의 긴장은 극적으로 누그러졌다. 마침내 4월27일 판문점에서 남북 두 정상이 손을 마주 잡았다. 3차 남북 정상회담을 에 다시 와서 보게 됐다. 차갑게 식은 줄로만 알았던 가슴도 뭉클했다.

하지만 나는 너무 멀리 왔다. 추억할 뿐 첫사랑을 다시 만날 순 없는 노릇이다. 지난 10년의 암흑기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평화를 염원하며 생중계 영상을 보다가도 모처럼 다시 핀 봄꽃이 질까봐 가슴 한편은 조마조마했다. 책을 가져간 후배 기자는 10년이 지나서도 꿈을 접지 않는 세상 속에 있길….

류이근 편집장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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