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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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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기억

등록 2018-02-13 15:04 수정 2020-05-03 04:28

‘꼭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 한켠이 피곤해져옵니다. 우리 주변에 기억할 일이 너무 많아서입니다.

2018년 2월을 살아가는 한국인이라면 2014년 4월16일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날 있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7시간’도 기억해야 하며, 경찰 물대포에 맞아 비명횡사한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잊어선 안 되고, 지난 수요일 기준으로 벌써 1321회를 맞이한 수요집회와 끝내 일본의 올바른 사과를 받아내지 못한 할머니들의 헝클어진 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복잡한 한국 현대사에서 기억할 일이 그뿐인가요. 일제에 부역하고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들을 잊지 말아야 하고, 제주 4·3의 비극을 기억해야 하고, 한국전쟁과 그 ‘광기의 시간’에 저질러졌던 수많은 학살을 기억해야 하며, 4·19를 알아야 하고, 5·18이라는 잔인무도한 학살에 눈물 흘려야 하고, 최근 영화 이 고발하듯 군사정권의 야만에 분노해야 합니다. 그 밖에 한국 사회엔 기억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특별하고 고귀한 행위입니다. 우리가 기억하겠다고 다짐한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렇게 알게 된 ‘진실’을 잊지 않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순정했던 분노의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은 명확히 정리하기 힘든 감정의 찌꺼기로 변해 흩어집니다. 그래서 “꼭 기억하겠다”는 외침은 결국 그 모든 가슴 저린 순간들을 망각하고 마는 우리 운명에 대한 변명같이 들리기도 합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2월9일은 평창겨울올림픽이 열리는 날입니다. 이번호 ‘만리재에서’엔 뭘 써야 할까 고민했습니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사이엔 오랜만에 훈풍이 붑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현재의 대화 분위기를 잘 살려 북핵과 미사일 문제 해결을 위한 또 다른 대화의 자리로 북한을 이끌려 합니다.

이런 대화 분위기에 재를 뿌리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월9일 한국에 옵니다. 그 직전인 2월7일 아베 총리와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일본 도쿄에서 연 기자회견 내용은 가관이었습니다. 미국과 일본은 온갖 강경한 표현을 써가며 북한의 대화 공세에 넘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거꾸로 사드 문제로 한국과 격렬히 대립하던 중국은 한·중이 힘을 모아 북·미 직접 대화를 위해 노력하자고 말합니다.

이같은 강대국의 치열한 힘겨루기 속에서 평창올림픽을 진짜 ‘평화올림픽’으로 만들어야 하는 한국 정부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습니다. 문 대통령의 외교 역량은 지금부터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릅니다.

그렇지만 지난주 나온 판결 하나를 꼭 소개하고 싶습니다. 서울고법 민사22부(재판장 이범균)는 2월8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낸 기지촌 여성 117명에게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놨습니다. “국가는 기지촌 운영·관리에 있어 외국군을 상대로 한 성매매를 정당화·조장함으로써, 원고들의 성적 자기결정권, 나아가 성으로 표상되는 원고들의 인격 자체를 국가적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

10년 전 의 젊은 사회팀 기자였을 때 박수진 문화팀 기자와 기지촌 할머니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기억<font color="#C21A1A">(2008년 1월25일치 제695호 표지이야기)</font>이 납니다. 당시 기사의 제목은 ‘국가가 포주였다’였습니다. 대한민국 법원은 결국 국가와 군이 여성들에게 상처를 준 거대한 포주였음을 인정하며 국가는 할머니들께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국가가 여성의 성을 국가 안보를 위한 도구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수십 년 동안 그 상처를 방치해왔다는 사실을.

평창겨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기원하며, 설날 통권호를 독자님들께 올립니다. 댁내 평안만 가득하시길!

길윤형 편집장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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