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은 앳된 소년이 ‘클레이 코트’에 서 있습니다. 그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된 상태입니다. 4세트부터 다리에 쥐가 나 여러 차례 메디컬 브레이크를 요청했고, 이를 드러내듯 상대의 공이 사이드라인 구석을 찌를 때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듯 가여운 비명을 지르며 쫓아갑니다.
누구냐고요? 마이클 창(45). 동양인 남성으로서 유일무이하게 테니스 그랜드슬램대회에서 우승한 바로 그 사내입니다. 창은 1989년 롤랑 가로스(프랑스오픈)에서 17살 3개월의 나이로 우승을 거뒀습니다. 이때 창이 세운 그랜드슬램대회 최연소 우승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은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해 롤랑 가로스에서 창은 테니스 역사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승부를 펼칩니다. 상대는 당시 남자프로테니스(APT) 랭킹 1위인 ‘불굴의 사내’ 이반 렌들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롤랑 가로스를 세 번이나 제패한 세계 최강의 선수였습니다. 당연히 세계 테니스계는 렌들이 신장 175cm에 불과한 왜소한 동양 소년에게 낙승을 거둘 것이라 예상합니다.
전문가들의 예상대로 렌들은 첫 두 세트를 6-4, 6-4로 쉽게 가져갑니다. 그러나 3세트부터 처절한 창의 수비 테니스가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창은 3세트를 6-3으로 잡아내며 게임을 4세트로 몰고 갑니다. 그러나 무리한 탓인지 시합 도중 다리에 쥐가 나고 맙니다. 절뚝거리는 다리로 코트를 지키던 창은 렌들의 날카로운 스트로크를 ‘문 볼’(moon ball)이라는 높은 톱스핀 스트로크로 쳐냅니다. 공을 위로 높게 띄워 렌들의 날카로운 공격에 대비하자는 전략이었습니다. 창의 변칙 작전에 흔들린 렌들은 다시 4세트를 3-6으로 내주고 맙니다.
기적 같은 5세트가 시작됐습니다. 게임 스코어 4-3으로 앞선 상황에서 창의 서브게임이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창은 자신의 서브게임에서 15-30으로 뒤처집니다. 다시 한 포인트를 내줬다간 서브게임을 브레이크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 창은 테니스사에 길이 남을 기이한 플레이를 펼칩니다. 공을 위로 올려 상대 코트에 강하게 때려넣는 통상적인 서브를 포기하고, 동네 하수 아저씨들의 ‘친선 경기’에서나 볼 수 있는 언더핸드 서브를 넣은 겁니다. 당황한 렌들이 네트 쪽으로 달려와 가까스로 공을 받아넘기자 창의 기습 공격이 이어집니다. 렌들은 이 공을 받아내지만 공은 베이스라인을 벗어납니다. 창의 승리. 나중에 이 경기를 회상하는 인터뷰에서 창은 “이 득점으로 인해 렌들의 멘털이 붕괴됐다. 그래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창 이후 테니스 그랜드슬램대회에서 결승에 오른 유일한 동양 선수는 일본인 니시코리 게이입니다. 니시코리는 2014년 US오픈 결승에 진출했습니다. 당시 일본 도쿄에 살던 저는 《NHK》 생중계로 그의 경기 실황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니시코리는 4강에서 한국인들에게도 이제 익숙해졌을 노바크 조코비치를 만나 꺾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저는 너무 놀라 며칠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니시코리의 기적이 이어지는 동안 중계 카메라는 관객석에 앉은 또 한 명의 남자의 얼굴을 비춥니다. 니시코리의 코치, 마이클 창이었습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던 표정의 앳된 소년은 이제 푸근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경기를 보며, 같은 아시아인으로 묘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오픈 테니스 4강에 오른 정현의 업적이 대단한 거냐고요? 1968년 테니스 그랜드슬램대회가 현재 체제를 갖춘 뒤 4강에 올라온 남자 아시아인은 오직 3명뿐입니다. 창, 니시코리 그리고 우리의 ‘CHUNG’! 스포츠는 때로 우리 삶에 묘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정현의 사연을 이번호 표지이야기로 올린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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