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2학년 때 돌아가신 아버지는 철도 공무원이었습니다. 20대 후반에 지금은 코레일로 민영화된 철도청에 들어가 25년 정도 근속한 뒤 53살에 퇴직해 이듬해 숨졌습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퇴근해 돌아온 아버지는 시계와 공무원증을 풀어 어머니의 화장대 위에 놓곤 했습니다. 지금의 9급시험을 쳐 공무원이 된 아버지의 공무원증엔 ‘운수 주사’라는 직함이 적혀 있었습니다. 어릴 땐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면 ‘일반행정직’ ‘사회복지직’과 같은 공무원의 계열 분류상 아버지는 철도의 운행을 책임지는 ‘운수직’이었고 직급상 ‘6급’에 해당하는 주사가 아니었나 짐작합니다.
오랫동안 ‘만년 주사’로 지내던 아버지는 1990년대 초 어느 시점에 ‘피 튀기는’ 5급 승진 시험에 합격해 사무관이 되었습니다. 그 뒤 영월역, 고한역 등 강원도 산간 지역을 관통하는 태백선의 오지 역장으로 5~6년을 ‘구른’ 뒤, 다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아마 50대 초반의 일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이후 지금은 광운대역으로 이름이 바뀐 성북역의 운수 과장을 지낸 뒤 의왕역 역장을 하다 간암 판정을 받은 뒤 8개월 뒤 숨졌습니다.
암에 걸린 아버지는 퇴직을 준비했습니다. 아버지에겐 대학 3학년에 다니던 누나와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한 저, 이렇게 두 명의 자식이 있었습니다. 철도청은 ‘희망퇴직’ 의사를 밝힌 아버지의 직급을 5급 사무관에서 4급 서기관으로 한 계단 올렸습니다. 그리고 정년을 모두 마치고 퇴직할 때보다 후하게 퇴직금을 정산해 지급했습니다. 그 돈으로 대학생이던 저와 누나가 학교를 마쳤고, 제가 졸업해 돈을 벌 때까지 저희 가족은 버틸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어머니 집에 가면 25년 넘게 국가를 위해 일한 아버지를 치하하는 고건 국무총리의 표창장이 걸려 있습니다.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집 얘길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것은 한 조직이, 그 조직을 위해 젊음을 바친 노동자에게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예의’에 대해 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번주 표지이야기에서는 구조조정을 위해 장기 근속한 노동자들에게 혹독한 감사를 진행해 퇴사를 유도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삼성SDI의 얘길 다룹니다. 정환봉 기자가 월요일 오전 편집회의 때 이와 관련된 보고를 했을 때 전 귀를 의심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감사를 받다 우울증에 걸려 산재 인정을 받은 사람이 있다는 ‘팩트’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희망퇴직 때 지급해야 하는 ‘위로금’을 아끼기 위해서였을까요?
이런 의혹이 사실이라면, 삼성SDI와 같은 번듯한 기업에서 시행한 ‘인사 정책’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치졸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언제든 내가 회사에서 비참하게 버려질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노동자들은 회사를 위해 최선을 다하길 포기합니다. 그리고 그런 회사엔 곧 망조가 듭니다.
당혹스러운 마음에 삼성SDI 누리집에 접속해 이 회사의 실적 자료를 살펴봤습니다. 디스플레이 부문의 경쟁 격화 때문인지 매년 적잖은 영업이익을 내던 회사는 2015년부터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회사도 여러 고민을 했을 겁니다.
에 입사한 지 만 16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이 회사에서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고, 이 조직의 구성원임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철도 공무원으로 레일 위에서 평생을 지내셨을 아버지도, 혹독한 감사에 못 이겨 끝내 사표를 제출했을 삼성SDI의 노동자들도 같은 심정이었을 겁니다. 조직을 위해 젊음을 바친 노동자에게 예의를 지켜주세요. 드릴 말씀은 그것뿐입니다.
길윤형 편집장 charisma@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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