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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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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버려지다

등록 2017-10-17 15:01 수정 2020-05-03 04:28

대학교 2학년 때 돌아가신 아버지는 철도 공무원이었습니다. 20대 후반에 지금은 코레일로 민영화된 철도청에 들어가 25년 정도 근속한 뒤 53살에 퇴직해 이듬해 숨졌습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퇴근해 돌아온 아버지는 시계와 공무원증을 풀어 어머니의 화장대 위에 놓곤 했습니다. 지금의 9급시험을 쳐 공무원이 된 아버지의 공무원증엔 ‘운수 주사’라는 직함이 적혀 있었습니다. 어릴 땐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면 ‘일반행정직’ ‘사회복지직’과 같은 공무원의 계열 분류상 아버지는 철도의 운행을 책임지는 ‘운수직’이었고 직급상 ‘6급’에 해당하는 주사가 아니었나 짐작합니다.

오랫동안 ‘만년 주사’로 지내던 아버지는 1990년대 초 어느 시점에 ‘피 튀기는’ 5급 승진 시험에 합격해 사무관이 되었습니다. 그 뒤 영월역, 고한역 등 강원도 산간 지역을 관통하는 태백선의 오지 역장으로 5~6년을 ‘구른’ 뒤, 다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아마 50대 초반의 일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이후 지금은 광운대역으로 이름이 바뀐 성북역의 운수 과장을 지낸 뒤 의왕역 역장을 하다 간암 판정을 받은 뒤 8개월 뒤 숨졌습니다.

암에 걸린 아버지는 퇴직을 준비했습니다. 아버지에겐 대학 3학년에 다니던 누나와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한 저, 이렇게 두 명의 자식이 있었습니다. 철도청은 ‘희망퇴직’ 의사를 밝힌 아버지의 직급을 5급 사무관에서 4급 서기관으로 한 계단 올렸습니다. 그리고 정년을 모두 마치고 퇴직할 때보다 후하게 퇴직금을 정산해 지급했습니다. 그 돈으로 대학생이던 저와 누나가 학교를 마쳤고, 제가 졸업해 돈을 벌 때까지 저희 가족은 버틸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어머니 집에 가면 25년 넘게 국가를 위해 일한 아버지를 치하하는 고건 국무총리의 표창장이 걸려 있습니다.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집 얘길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것은 한 조직이, 그 조직을 위해 젊음을 바친 노동자에게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예의’에 대해 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번주 <font color="#C21A1A">표지이야기</font>에서는 구조조정을 위해 장기 근속한 노동자들에게 혹독한 감사를 진행해 퇴사를 유도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삼성SDI의 얘길 다룹니다. 정환봉 기자가 월요일 오전 편집회의 때 이와 관련된 보고를 했을 때 전 귀를 의심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감사를 받다 우울증에 걸려 산재 인정을 받은 사람이 있다는 ‘팩트’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희망퇴직 때 지급해야 하는 ‘위로금’을 아끼기 위해서였을까요?

이런 의혹이 사실이라면, 삼성SDI와 같은 번듯한 기업에서 시행한 ‘인사 정책’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치졸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언제든 내가 회사에서 비참하게 버려질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노동자들은 회사를 위해 최선을 다하길 포기합니다. 그리고 그런 회사엔 곧 망조가 듭니다.

당혹스러운 마음에 삼성SDI 누리집에 접속해 이 회사의 실적 자료를 살펴봤습니다. 디스플레이 부문의 경쟁 격화 때문인지 매년 적잖은 영업이익을 내던 회사는 2015년부터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회사도 여러 고민을 했을 겁니다.

에 입사한 지 만 16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이 회사에서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고, 이 조직의 구성원임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철도 공무원으로 레일 위에서 평생을 지내셨을 아버지도, 혹독한 감사에 못 이겨 끝내 사표를 제출했을 삼성SDI의 노동자들도 같은 심정이었을 겁니다. 조직을 위해 젊음을 바친 노동자에게 예의를 지켜주세요. 드릴 말씀은 그것뿐입니다.

길윤형 편집장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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