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기자’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기자들은 해마다 돌아오는 기념일에 맞춰 쓰는 기사를 ‘달력 기사’라 부릅니다. 예를 들어 5월5일 어린이날을 맞아 내는 결식아동 특집, 4월20일 장애인의 날을 맞아 보도하는 장애인 이동권 기획이 대표적인 달력 기사입니다.
평소 아동이나 장애인 문제에 관심 없던 언론사들은 기념일에 맞춰 겨우 특집 기사 한두 줄을 게워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달력 기사’라는 말엔 중요한 사회 현안에 발빠르게 대응하지 못하는 언론이 ‘빨간 날’에 맞춰 면피를 시도한다는 부정적 어감이 녹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달력 기자는? 달력 기사를 전문적으로 써대는 기자를 뜻합니다.
저는 의 대표적 달력 기자입니다. 한동안 신문사에서 한국 사회의 중요한 변곡점이 되는 사건의 의미를 되짚는 ‘○○주년’ 기획을 도맡았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2010년 한 해에만 4·19혁명 50주년, 5·18민주화운동 30주년, 한국전쟁 60주년, 국치(일본에 의한 한국 강제 병합) 100년 기획을 전담했고, 일본 도쿄특파원이던 2015년엔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 기사를 써댔습니다. 찾아보니 10년 전 2007년 6월8일치 (제663호)에 6월 항쟁 20주년 표지이야기를 쓴 것도 저였더군요.
○○주년 기사는 관성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쓰기가 어렵습니다. 관성적인 주제를 차별화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기자들은 과거 사건에서 ‘현재적 의미’를 찾아내려 애씁니다.
10년 전 제가 쓴 6월 항쟁 20주년 기사의 빛깔은 회색입니다. 기사에서 젊은 날의 저는 1987년 뜨겁던 여름에 대해 “벅찬 승리였고, 시린 상처였다”고 적었습니다. 여기서 방점이 찍히는 단어는 승리가 아닌 ‘상처’입니다.
2007년 여름, 를 포함한 한국의 진보 진영은 일종의 패배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해 12월로 다가온 대통령선거의 가장 유력한 두 후보가 이명박과 박근혜였기 때문입니다. 둘은 당시 정치권에서 거론되던 10여 명의 유력 대선 후보 가운데 ‘87년 여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존재들이었습니다. 그해 여름 이명박 현대건설 사장은 중동 특수에 힘입어 ‘일만’ 하고 있었고, 박근혜 육영재단 이사장은 서울 신당동 집과 능동 어린이회관을 오가는 은둔자였습니다. 이같은 음울한 사회 분위기 속에 서른한 살의 사회팀 기자 길윤형은 6월 항쟁을 ‘시린 상처’라고 표현합니다.
10년이 흘렀습니다. 이번호 표지이야기인 6월 항쟁 30주년 특집 기사를 준비한 것은 오승훈·서보미 기자입니다. 두 기자가 그려내는 30년 전 이야기는 희망으로 밝게 빛납니다. 두 기자는 30년 전 거리에 있었던 ‘무명의 주인공’ 3명의 인생사를 씨줄 날줄로 엮어 1987년 6월과 2016~2017년 박근혜 정권을 타도한 촛불혁명의 연속성을 감동적으로 포착했습니다.
과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 있는 현재입니다. 30년 전 우리가 꿈꾸던 ‘그날’이 왔는지 알 수 없지만, 최루탄 매캐한 거리에서 우리가 견뎌낸 그때 그 시간들이 “한밤의 꿈은 아니”었음을 증명해낸 것은 우리 자신이었습니다.
길윤형 편집장 charisma@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윤석열 친구’ 선관위 사무총장도 ‘부정선거론’ 반박했다
권영세 “‘공수처 굴종’ 검찰총장 사퇴하라”…국힘, 검찰 일제히 비판
‘내란의 밤’ 빗발친 전화 속 질문…시민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윤석열 충암고 동창’ 정재호 주중대사, 탄핵정국 속 이임식
“새해 벌 많이 받으세요”…국힘 외면하는 설 민심
서부지법, ‘윤석열 영장판사 탄핵집회 참석 주장’ 신평 고발
‘뿔 달린 전광훈 현수막’ 소송…대법 “공인으로 감당해야 할 정도”
전도사 “빨갱이 잡으러 법원 침투”…‘전광훈 영향’ 광폭 수사
부산 교통체증 가장 심한 도로에 14㎞ ‘공중 정원’ 생기나
서부지법서 ‘기자 폭행·카메라 파손’ 1명 구속…‘강도상해’ 혐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