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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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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문란

등록 2017-06-06 16:50 수정 2020-05-03 04:28

외교·안보 분야를 전문적으로 파고들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기자들이 꼭 읽어야 하는 책들이 있습니다. 필독서 리스트엔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요 외교적 협상에 직접 참여한 ‘당사자’들이 쓴 회고록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몇 권을 꼽아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외교·안보 ‘브레인’으로 꼽혔던 임동원 전 국가정보원장의 , 노무현 전 대통령의 ‘책사’ 이종석 세종연구소 연구위원(통일부 장관)이 쓴 , 의 한반도 담당 기자였던 돈 오버도퍼의 ,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의 등이 있습니다.

몇 해 전이었던가요. 임동원 선생의 를 읽다가, 피가 거꾸로 솟을 만큼 분노한 적이 있습니다. 세간에 ‘이동복 훈령 조작’ 사건으로 알려진 한 편의 국기 문란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1989년 12월 냉전이 공식적으로 종식되자 당시 노태우 정권은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만들기 위해 과감한 대북 외교를 추진합니다. 그 구체적인 성과물이 1991년 12월 남북기본합의서입니다. 이후 남북은 이산가족 상봉 등 주요 현안을 풀기 위해 고위급 회담을 이어갑니다.

1992년 9월16일 밤 11시30분, 제8차 남북 고위급 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 남쪽 평양 대표단은 서울로 훈령을 요청하는 ‘청훈 전문’을 보냅니다. 당시 회담의 주요 쟁점은 장기수 이인모씨의 북송 문제였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북으로 출발하는 대표단에게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사업의 정례화 등 3가지 제안을 북에서 받아들일 경우 이씨를 북으로 송환할 수 있다는 훈령을 제시합니다. 북도 “이씨의 송환이 보장되면 올해 안에 이산가족면회소를 판문점에 설치할 수 있다”는 유연한 자세를 보입니다.

애초 노 대통령이 제시한 3대 조건엔 못 미치지만 나름 긍정적 반응을 얻어낸 대표단은 서울에 “어찌할까”를 묻는 훈령을 재요청하기로 합니다. 이 순간 민주국가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국기 문란 행위가 벌어집니다. 이 협상을 비틀어야겠다고 결심한 이동복 남쪽 대표단 대변인은 독단으로 국가안전기획부 통신망을 인용해 “청훈 전문을 묵살하고 ‘이인모 건에 관하여 3개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협의하지 말라’는 회신을 보내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됐습니다. 임 선생은 책 속에서 이 사건을 회상하며 “‘안보 불안과 긴장 조성으로 남북관계가 파행되는 것이 특정 대통령 후보의 당선에 유리하다’는 일부 안기부 간부들의 구시대적 판단에 따른 조직적 활동”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동복씨는 어찌됐냐고요? 정원식 국무총리는 “내 부덕의 소치”라는 말로 이 사건의 추궁을 포기합니다. 결국 이 사건은 발생 뒤 1년이 지난 1993년 11월이 되어서야 감사원 감사를 통해 전말이 밝혀졌습니다. 이동복씨는 안기부에서 해임되지만, 사법처리를 면한 뒤 북한민주화포럼 상임공동대표 따위의 직함을 달고 지금도 활발히 사회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한민구 국방부 장관의 사드 발사대 4기 ‘보고 누락’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이 “충격적인 일”이라는 반응을 보인 뒤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충격받은 것은 문 대통령뿐만이 아닙니다. 이동복 사건 이후 26년이 흘렀지만, ‘우리 사회 안의 이동복’들의 힘은 여전합니다. 이번엔 그냥 넘어가선 안 됩니다. 절대, 그냥 넘어가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길윤형 편집장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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