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앓이’를 겪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어떤 순간을 계속 떠올린다.
2011년 3월, 처음으로 혼자 제주에 갔다. 사흘 동안 동남 해안길과 서쪽 곶자왈을 걸었다. 검은 바위를 돌아 해변을 걷는데, 어느 할머니가 한치와 한라산 소주를 도마 옆에 늘어놓았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할머니는 나를 쳐다보았다. 시선을 피해 그냥 걸었다. 올레 코스를 마저 걷겠다는 생각이었다. 두고두고 원통하다. 하루치 코스를 다 못 걷더라도, 그냥 주저앉아 소주를 마셨어야 했다.
걷다가 마주친 작은 알림판도 기억난다. 목호의 난에 가담한 무리가 최영 장군과 마지막 전투를 벌이다 패퇴당한 곳이라는 설명이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 알림판의 문장은 고려 최영 장군이 선량한 이들을 몰살했다는 투였다. 고려의 탐라 복속-삼별초의 대몽항쟁-몽골의 직할통치-목호의 난 등으로 이어지는, 단일민족국가 정체성에 복속되지 않는 제주의 역사를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이미 그때 내 마음은 쓸쓸해졌다. 어쩌면 탐라 사람들은 고려의 최영보다 몽골의 목호들을 더 아끼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이제는 화약에 폭발돼 산산이 조각나고 그나마 남은 것은 시멘트로 덮어졌을 강정 구럼비 바위도 생각난다. 단단하고 매끈하고 새카만 바위가 들판처럼 펼쳐졌다. 난생처음 보는 풍경 속을 꿈처럼 걷다가 작은 낭떠러지를 만났다. 아래는 온통 파도였다. 흰 포말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가냘픈 아주머니가 가부좌를 틀고 명상하고 있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인지, 날더러 어쩌란 말인지, 고함치고 싶었으나, 그녀의 평화를 방해할 순 없었다.
그 뒤부터 줄곧 발을 묶은 고무줄 한 끝을 한라산 중산간 어느 곳에 매달아둔 기분이었다. 자꾸 제주에 끌려 내려가곤 했다.
왜 그러는 것인지 이제야 조금씩 이해하게 됐다. 아주 오랫동안, ‘우리’의 문제를 풀어야 내가 행복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일의 끝이 어디인지 궁금해졌다. 능력이 허락하는 임계점을 언제 맞닥뜨리게 될지 생각했다. 이젠 나도 우리에 대해 좀 그만 생각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시름의 결이 깊어지면 제주로 갔다. 우리의 짐을 좀 덜어내는 날이 어서 와서, 누구의 눈총도 신경 쓰지 않고, 그것을 거절하지 않고, 꽉 껴안는 일을 상상했다. 우리로부터 자유로워진 나 자신을 만나는 일이 제주에선 가능했다. 제주는 그렇게 상상과 궁리와 음모의 상징이 됐다.
그런 꿈을 꾸는 이들을 위해 이번호를 준비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주에 대한 기사다. 한 달여 전부터 자료 조사 등을 벌였다. 짧게는 이틀에서, 길게는 열흘까지 10여 명의 기자들이 현지에서 취재했다. 이것은 각자의 꿈이 깃들 제주에 대한 기록이자, 서울로 변질되고 있는 제주에 대한 고발이며, 제주에서 서울을 털어내자는 호소이다.
이번호는 사상 첫 여름 합본호이기도 하다. 매년 설과 추석에 즈음하여 인쇄소·우체국·독자의 휴일을 감안해 2주치를 한꺼번에 발행해왔는데, 여름휴가 절정기에도 그 사정이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고, 처음 합본호를 시도했다. 기자들에게도 여유가 좀 생긴 셈이지만, 대다수 기자들은 다음호 지면 개편을 준비하느라 쉬지 못할 것이다. 제주앓이를 치르는 선량한 독자들을 위해 우리는 언론앓이를 조금 더 견뎌내야 할 것 같다.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font size="4"><font color="#00847C">이 기사를 포함한 제주에 관한 모든 기사를 만나볼 수 있는 낱권 구매하기!</font></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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