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 용어 가운데 ‘포지셔닝 구호’(Positioning Statement)라는 게 있다. 경쟁자와 구분되는 독창적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대표 사례 가운데 어느 조미료 회사가 있다. 만년 2위였던 A사는 ‘천연 조미료 ○○○’라고 스스로 자리매김하면서 1위 업체였던 B사의 제품을 졸지에 ‘화학 조미료’로 몰아넣었다. ‘준비된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성공한 포지셔닝 구호의 사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 내건 이 구호는 다른 후보들을 ‘미성숙한’ 정치인으로 격하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최근의 사태는 박근혜 대통령의 새로운 포지셔닝과 관련 있다. 포지셔닝 구호가 아직 공식 천명되진 않았지만, 대체로 보아 ‘(북한과) 싸우는 대통령’으로 표현할 수 있다. 보수언론조차 그 ‘계산’에 의문을 표하는바, 개성공단 철수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는 경제적 이익에 배치된다. 박 대통령은 ‘핵개발에 들어간 돈줄을 끊었다’는 프레임을 동원했지만, 이는 간단히 논박 당할 주장이다.
개성공단 폐쇄에 따른 한국의 손실액은 북한의 손실액보다 훨씬 더 크다. 북한에 들어간 돈의 대부분은 그곳 노동자들의 임금으로 지급됐다. 신묘한 재주를 부려 통치자금으로 전용했다 해도 공단 폐쇄가 그 명줄을 끊는 것은 아니다.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훨씬 많은 자금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공단 폐쇄로 인한 한국의 이득이 있다 해도, 뒤이은 사드 배치·유지에 들어가는 수조원의 천문학적 비용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 모든 지출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중국과의 관계 유지를 통해 (박근혜 정부가 의도하는) 손실을 대부분 상쇄시킬 수 있고, (박근혜 정부의 기대와 달리) 중국은 미국의 압박에 숙이고 들어갈 이유와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러나 이런 ‘손익계산’의 반박이 박근혜 정부에 타격을 줄 것 같지는 않다. ‘김정은의 돈줄을 끊었다’는 레토릭이 사실과 다르다 해도, ‘북한에 당당히 맞선다’는 박근혜 정부의 포지셔닝 구호는 살아 남을 것이고, 이는 40% 안팎의 지지층에게 대단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할 것이다. 카타르시스라는 감정이 원래 그렇듯, ‘북한과 싸우는 대통령이 오랜만에 등장했다’는 (호전적) 카타르시스는 그 지지층으로 하여금 온갖 사회적 손실을 인내하게 만들 것이다.
‘싸우는 대통령’의 대표 사례로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있다. ‘스타워스’ 등 군비경쟁을 통해 소련과 맞섰는데, (수많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공고한 지지층을 형성해 연임에 성공했다. 국내에선 이승만과 박정희가 대표적이다. 호전적 대북 노선을 천명한 두 정권은 크고 작은 군사적 충돌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장기 집권에 성공했다.
이런 포지셔닝의 대통령 치하에서 일어나는 또다른 현상이 있다. 증오는 에너지 소모가 많은 감정 상태다. 국가적 증오는 모든 구성원의 갈등·긴장·스트레스를 극한까지 높인다. ‘싸우는 대통령’은 (사회적 합의 과정을 생략하고) 대기업에 특혜를 베풀어 총력전의 기반으로 삼는데, 그 과정에서 사회안전망도 증발한다. 오늘날 전세계 경제위기의 출발은 ‘소련을 붕괴시켰다’고 자찬했던 레이건 대통령이 도입한 신자유주의에 있다. 덕분에 냉전이 가고 빈곤이 왔다.
북한과 싸우겠다는 박 대통령의 포지셔닝은 지지층을 한껏 고무하고 반대층을 손쉽게 궤멸시키며, 여느 정치인들과 자신을 완전히 차별화시킬 것이다. 최근 20여 년 동안 간간이 일었던 남북 긴장 국면에서 나는 한 번도 전쟁을 걱정한 적이 없다. 그러나 이제 대통령이 내건 포지셔닝의 ‘논리적 귀결로서’ 남북 간 국지전은 피할 수 없는 일로 보인다. 그래도 상관없다는 포지셔닝을 찾아 대통령이 움직였다. 대통령은 싸울 것이다. 우리는 어찌 할 것인가.
*서재근 포스트비쥬얼 상무가 마케팅 관련 도움말을 줬습니다.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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