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장에도 꽃은 피고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으니, 나도 취미라는 게 있어 가끔 영화 본다. 얼마 전 를 봤다. 안내 팸플릿에는 블랙코미디·판타지·로맨스 영화라고 적혀 있다. 섹시가이 콜린 패럴은 늘어진 뱃살의 중년을 연기한다. 예쁘고 착한 (것임이 틀림없는) 레이철 와이즈는 예쁘고 착하게 나온다. 그들을 만나는 것으로 호사는 충분하지만 기대 밖의 영감도 얻었다. (몇 편 안 되지만) 2015년 만난 영화 가운데 최고다.
언제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나라. 커플이 아니면 도시에서 추방된다. 이혼당한 남자(콜린 패럴)는 ‘솔로’들만 수감된 시설에 갇힌다. 짝을 찾지 못하면 강제로 ‘전환 수술’을 당한다. 어떤 동물로 살아갈지 결정할 수는 있다. 남자는 100년을 산다는 랍스터를 선택해둔다.
남자는 짝짓기에 실패한다. 수감시설을 탈출한다. 자유롭게 살겠다는 솔로들은 숲에 모여 있다. 금기는 있다. 사랑하면 안 된다. 입맞춤하면 입술을 꿰매버린다. 남자는 숲에서 만난 여자(레이철 와이즈)와 사랑에 빠진다. 비밀 연애는 발각된다. 여자는 시력을 잃는 형벌을 받는다. 남자는 눈먼 여자와 함께 숲을 탈출한다.
돌아온 도시의 식당, 남녀는 손을 맞잡는다. “시력을 잃어도 다른 감각을 얻을 거야.” 여자가 말한다. 남자는 나이프를 들고 화장실에 간다. 제 눈을 찌르려는, 아니, 찌를까 말까 주저하는 찰나, 장면이 바뀌어 여자가 말없이 의자에 앉아 있다. 영화가 끝난다. 남자와 여자는 어찌됐을까.
처음엔 연애·가족에 대한 풍자로 읽혔다. 돌이켜보니 무리짓기와 그 폭력에 대한 이야기다. 도시에서 커플은 평화롭다. 솔로를 추방하는 폭력을 인내한다면. 짝짓기는 희망적이다. 사람을 동물로 전환시키는 폭력을 잊는다면. 숲 속은 자유롭다. 연인을 죽이는 폭력에 눈감는다면. 무리를 저버려도 사랑은 감미롭다. 제 눈을 찌를 수만 있다면….
새해부터 3년 동안 총선·대선·지방선거가 이어진다. 정치의 본질은 동서고금에서 바뀐 게 없다. 큰 무리를 이루면 지배한다. 정치판에 횡행하는 고차방정식은 모두 산수로 치환할 수 있다. (처음엔 빼고 나누더라도) 결국 더하기를 많이 하는 자가 이긴다. 단순한 산수가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은 인내할 수 있는 폭력의 종류와 수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폭력, 친박의 폭력, 친노의 폭력, 독자 세력의 폭력 가운데 무엇을 거부할 것인지 판단이 다르다.
새누리당이 공고한 지배를 구축한 것은 그 주역들이 (놀랍도록 뻔뻔하게) 모든 종류의 폭력에 둔감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국 사회의 비극이지만 그 정당에는 축복이다. 그들은 절대로 무리의 크기를 줄일 생각이 없다.
야당 쪽에는 폭력에 민감한 자들이 모여 있다. 그것이 ‘반박근혜 정치’의 본질이긴 하다. 다만 인내의 수위를 계속 낮추면 더 많은 작은 무리로 분화할 것이라는 점도 분명하다. 대통령 중심제인 한국에서 ‘정당간 연합 정치’는 요원한 일이다. 그런 제도가 만들어질 리 없는 향후 3년 동안 작은 무리의 그들은 계속 패배할 것이다. 어느 수준에서건 폭력을 인내할 의지가 없는 자는 무리에 낄 수 없고 권력을 얻지 못한다.
애착은 냄새로 다가오고 폭력은 소리로 기억되며 이별은 예감으로 찾아온다. 권력의 고운 냄새를 맡은 이들은 새누리당에 모여든다. 대통령의 협박은 그 목소리에 대한 기억으로 생생한데, 나의 예감은 이별에 가닿는다. 앞으로 야당은 더 많은 이별을 겪을 것이다. 신년호에서 여야 주요 주자들을 ‘다각 분석’했다. 다 읽은 뒤 답답하다면 영화 를 추천한다. 좋은 권력을 반드시 구현하려는 실력 있는 정치 엘리트, 제다이들이 환상의 이야기 속에 있다. 그런 제다이가 왜 한국에는 없는가.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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