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험날은 추웠다. 난방이 된 시험장에 앉으니 복부 아래서 지난 시간이 뜨듯하게 치올랐다. 대학 원서를 쓰려면 고등학교 진학주임이 찍어주는 교장 날인을 받아야 했다. 왕년에 유도를 했다는 그는 뺨을 때려 학생을 기절시키기도 했다. 때리지 않을 때는 전교조 교사를 비난했다. 가르치진 않고 공부하라고만 했다. 나는 그를 볼 때마다 눈에서 레이저를 발사했다.
“니는 인마 무조건 떨어진다, 무조건.” 진학상담실에 앉은 그는 이를 갈며 저주했다. 뚱뚱한 손으로 도장 찍는 것을 확인한 나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고 그를 향해 내뿜었다. 살집 좋은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상담실을 나왔다. 그것으로 고등학교와는 끝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식장에 가지 않았다.
대학에 갈 마음도 없었다. 되바라진 친구 몇 명은 이미 공장에 들어가 노동자의 삶을 시작한 터였다. 그때는 그것이 부러웠다. 그들이 겪을 천신만고의 슬픔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공부보다 행동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오전 시험을 마치고 엎드려 잤다. 누군가 뒤에서 허리를 쿡쿡 찔렀다. 돌아보니 어느 여학생이 손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오후 시험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그녀가 아니었던들 내처 잤을 것이다.
고교 시절이 싫고 대학도 마뜩잖았던 것은 ‘정답’ 때문이었다. 나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웠고, 반공웅변대회에 나갔고, 서예대회에서 ‘민족통일’을 흘림체로 썼다. 오랫동안 정답을 익혔고 제법 능숙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국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너거는 사랑의 반대말이 먼지 아나?” 누군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질문한 직후였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이다. 무관심이지.” 학생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사랑하면 알게 될 끼다. 무관심하지 않고 계속 관심을 가지면, 차차 나중에 알게 될 끼다.”
그는 현대사에 대해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그때부터 나는 역사를 공부했다. 교과서의 정답이 아닌 다른 사실을 찾아 다른 책을 뒤졌다. 정답 밖의 것을 폭력으로 밀어내는 교사들에게 그때부터 정나미가 떨어졌다. 정답을 배우는 것이라면 대학 공부도 필요 없다 생각했다.
반공 교육을 받은 이들이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주축이 된 것은 ‘정답 밖의 진실’을 만난 충격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통해 제 무덤을 파고 있다. 아이들은 장차 충격 속에 ‘반박근혜’의 투사가 될 것이다. 검인정 체제를 지나 자유발행제로 나아가고, 수업 시간마다 토론이 벌어지는 진짜 역사 공부를 향해 아주 더디게 나아가던 일이 온통 물거품이 된 것을 두고두고 성토할 것이다.
그래서 괜찮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난 30여 년의 비극적 반복이다. 극단의 정답을 외우고, 정답 바깥에서 다른 극단을 만나 열광하고, 그 극단에서 빠져나오다 다시 극단에 갇힐 것이다. 박정희 키드가 주사파가 되고 다시 뉴라이트가 됐던 것처럼 꽉 닫힌 이념의 회로 안에서 상대를 향해 돌을 던지게 될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해방·전후·독재 세대처럼 극단적 이념을 시계추처럼 오가며 인생을 허비할까봐, 오직 그것이 안쓰럽고 화가 난다. 나만 그랬으면 됐지, 왜 우리 아이들마저 그래야 하는가.
검인정 역사 교과서 시대의 막바지에서 공부한 아이들이 11월12일 수능시험을 치른다. 그들 모두 정답을 골라내길 기원한다. 아버지 세대는 끝내 ‘정답 없는 역사 시험’을 준비하지 못했다. 미안하고 죄스럽다. 대신 시험이 끝나면, 종류와 성향을 불문하고 역사책을 많이 읽길 권한다. 모든 공부의 근본은 역사다. 역사를 공부하면 알게 된다. 정답은 없다. 복잡한 사실과 여러 해석이 있을 뿐이다. 그것에 정답의 차꼬를 채우는 자는 문명의 적이자 야만의 표상이었음을 역사책이 일러줄 것이다.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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