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젊은 시절에는 물기가 없다. 지방이나마 대도시에서 태어났고, 부자까진 아니어도 중산층에서 자랐으며, 최고 직장은 아니라도 동경했던 언론사에 취직했다. 재수도 백수도 겪지 않은 20대는 이제 돌아보니 무난하고 무탈했다. 눈물 흘린 날이 없지 않았지만, 무너지듯 등때기가 서늘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것은 주로 사랑·역사·혁명에 대한 것이었다. 사는 일의 진짜 시커먼 밑바닥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삶의 비극을 나는 그저 추상했다.
이 생의 행로를 바꿨다. 2008년 겨울 어느 편집회의에서 지금은 희망제작소 변호사로 일하는 당시 임주환 기자가 제철업계의 불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숟가락을 얹었다. “그럼 고철 내다파는 사람들도 힘들겠네. 같이 써볼까.”
삭풍 부는 새벽, 인천 남동공단 주변 골목을 고철 줍는 할아버지와 함께 걸었다.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그것은 아마도 ‘외부자’의 시선이었겠는데, 궁핍하게 자랐다면 가난이 아주 범상해 보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으므로 빈곤의 구체는 끔찍했다. 비범한 빈곤을 목도한 뒤 ‘괴물경제, 고물인생’(제740호) 기사를 썼다. 이후 노동 OTL, 영구빈곤 보고서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빈곤 취재에 뛰어들었다.
기자의 행운은 세상의 비극과 함께 찾아온다. 마침 2008년 여름 광우병 촛불집회 이후, 한국 사회는 중대 변곡점을 지나고 있었다. 정치사회의 역동성이 소진되자 경제사회의 침체와 우울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몇 년에 걸친 여러 취재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보이지 않는 가난’이 한국 사회의 밑동을 흔들고 있고, 주로 노인·이주자·장애인에게 가난의 피해가 집중되는데, 강도는 다소 약하지만 더 심각한 빈곤 문제가 청년(및 청소년) 세대 전체에 번져 있다.
이제 한국 사회의 최하층 노동은 이주노동자들이 담당한다. 시골에는 가난한 노인들만 산다. 질병과 장애는 가난으로 급락하는 덫이 됐다. 마음과 정신이 아픈 사람도 많아졌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초조·불안·고립·원망에 빠져 있다. 장사하는 꿈만 꾼다. 자영업 시장의 붕괴 때문에 절대 이뤄지지 않을, 정규직 임노동자가 되는 길도 막혔으니 그것 말고는 도모할 일이 없어 그저 상념하는, 허무한 꿈이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유명한 저서로부터 차용하자면, 그것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비견될 만한 ‘경제발전 이후의 경제발전’에 대한 것이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도입됐지만, 계급 이해를 반영하는 정당 체제는 정착되지 않았고, 한국은 여전히 민주주의의 결핍으로 신음한다. 압축성장 이후 절대빈곤 문제는 해결됐지만, 기본 욕구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월급 100만원짜리 인생의 상대빈곤 문제는 오히려 확산됐다. 인생은 답을 구하는 게 아니라 질문을 바꾸는 과정이다. 역사 또한 그러하다. 민주주의가 도대체 무엇인지 1990년대가 물었다. 2010년대 들어 질문이 바뀌었다. 경제발전은 도대체 무엇인가.
노인·장애인·이주자가 일종의 ‘소수자’라면 청년은 ‘다수자’다. 주변인의 곤궁을 보듬는 것이 사회안전망이라면 다수자의 빈곤을 해결하는 것은 국가의 기본 책무다. 한국은 기본을 잃어가는 나라가 됐다. 청년 빈곤은 한국의 사회경제적 몰락을 표상한다.
둥지가 무너져 깃들 곳 없는 청년들에 대해 지난 3월부터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새정치민주연합 청년비례대표인 장하나 의원이 오랫동안 작업하고, 황예랑·김선식 기자가 집중 취재했다. 국내에선 처음으로 청년 빈곤에 대한 주요 데이터를 내놓는다. (가칭)청년경제기본법의 대강도 처음 소개한다. 여기, 추상이 아니라 구체로 꿈틀거리는 빈곤 청년들의 이야기가 있다. 그들은 괴물 같은 경제의 덫에 걸렸다. 고물인생을 일찌감치 시작해버렸다.
안수찬 편집장 ahn@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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